가마솥방 앞에는 수선화들이 노란 웃음을 노랗게 흘리고 있다.

어떤 노기도 그 앞에서 날 설 수가 없겠다.

심지어 말 못한 사랑을 전해얄 것만 같이 환하게 피었다. 

봄이다.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지친 영혼을 위한 여유로운 삶>(피에르 쌍소/공명, 2014)


지친다. 일로든 사람으로든 그렇다.

그건 어떤 일의 끝에서 만나는 감정이기도 하고

생의 고비고비마다 녹록치 않은 시간 앞에 나타나는 돌부리이기도 하고,

또한 그것은 주기적이기도 하고 느닷없기도 하다.

누구에게든 어느 때든 찾아든다.

그럴 땐 쉬어야지. 위로가 닿는다면 좋으리.

여기 책 한 권이 지쳐 있던 어깨를 다독여준다.

지침 예방주사가 될 가능성도 높다.


동문선에서 2000년에 낸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김주경 번역)를

공명에서 재번역하여 낸 책.

도서관에 서서 읽다가 대출한 다른 책들에 끼우지 않고 제자리에 넣던 책이었더니

재출간으로 눈길이 가게 되었다. 그래 놓고도 여러 해가 흘렀지만.

이 책의 제목을 직역하면 ‘느림의 올바른 사용법’이라지.

느림으로 얻게 된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제안이라는 의미에서

직역 제목을 그대로 쓰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니면 ‘지친 영혼 어루만지기’는 또 어떨지.


더디게 읽히는, 차츰 속도가 더 떨어지는, 마치 걷듯이,

그야말로 느린 책읽기였다.

뭐 좀 안 읽혔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

책은(책을 주어로 쓰지만 내가 주어일) 의미전달에 자주 실패했다.

길을 잃고 자꾸만 앞으로 가서 무슨 말인가 되짚어 읽었다.

경수필보다 중수필에 가까워 그런 걸까, 아니면 번역의 문제이거나 난독?

그보다는 원작이 ‘뻗어나간 생각이 많은’ 까닭으로 여겨졌다.

가끔 프랑스권 책을 읽을 때 겪는 사유의 다름에서 오는 까닭일지도 몰랐다.

또는 책이 아니라 나,

그러니까 산만한 개인사를 겪는 시기와 겹쳐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면 쉽게 넘어가지 않는 책장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은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 편안하게 그 느림을 받아들이고 소 여물 씹듯 읽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어느 샌가 챕터가 끝나 있었다.

그러니까 읽는 과정부터 느림으로 진입하고 있었기에

이 책이 말한 바의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책은 다 읽고 나서야

사방으로 마구 튄 물방울이 크게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덮을 때야 비로소 전하려던 말이 가지런해졌달까.

읽는 이에 따라 저마다 밑줄이 참 다를 책이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것 또한 이 책의 묘미이겠다.


‘느림은 시간을 성급히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 시간에 쫓겨 허둥대며 살지 않겠다는 의지, 세상을 넉넉히 받아들이며 인생길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능력을 키워가겠다는 의지의 확인이다.’(p.10)

느리게라는 말에는 굼뜨고 게으르다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굳이 ‘천천히’라고 바꿔서 쓴다.

그런데, 왜 천천히 살자냐고?

작가는 말한다, ‘나 자신을 위한 삶을 힘닿는 데까지 지켜내고 싶’기 때문이라고.(p.279)

누군들 쫓기며 살고 싶을까.

천천히 살 때 얻는 기쁨을 왜 모르겠는가,

한가로이 거닐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내게 환희로 오고

여유가 주는 일상의 한갓짐이 가져다주는 삶의 풍경을 누군들 동경하지 않을까.

그런데 천천히 살자가 무슨 선언까지 필요하냐 싶었다.

그건 빠름이 거대한, 전 지구적 상황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빠르니까, 그게 기준이고 뒤처지면 마치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것처럼 보이니까,

결국 세상 흐름에 대한 저항인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은 어쩌면 혁명에 대한 책이라고 말해야할지 모른다.

나 역시 세상흐름에 쫓기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한 삶을 힘닿는 데까지 지켜내고 싶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빨리 빨리이냐 말이다!

‘나는 나만의 속도에 맞추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운명의 여신이 나를 위해 미리 정해둔 속도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p.13)는 선언대로.

그런데, 어떻게 천천히 살지?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을 책은 옮긴다.

‘(...) 문을 열고, 편지를 쓰고, 손을 내미는 지극한 단순한 일에도 정성을 쏟아야 하며,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마치 세상의 운명과 별들의 운동이 그 일에 달려 있는 것처럼. 실제로 세상의 운명과 별들의 운동이 정말로 그 일에 달려 있다.’(p.143)

그러면 천천히 무엇을 하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껏 사용할 권리를 자신이 누리는 게 당연하다는 듯’

한가로이 거닐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정말 급하지 않은 일은 모두 미룬 채

행복감에 젖어 즐겁게 하품할 수 있는’ 권태를 누리고,

몽상에 빠져 시간의 흐름을 늦추고,

기도처럼 묵묵히 기다리고,

침묵과 명상을 선택하여 내면의 고향을 찾아들고,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언어를 꺼내 인내와 겸양으로 글을 쓰고,

숙성되는 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포도주를 음미하고,

성공의 증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성숙한 태도와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주체의식 속에

적은 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인 절제를 익혀

작은 즐거움을 맛보고 스스로 그런 즐거움을 만들어내고,

쉬고,

그리하여 삶을 즐기자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우리는 행복해지는 걸까?

‘나는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엇이 나를 행복에서 떼어놓는지는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쓸데없는 수다와 너그럽지 못한 행동, 그리고 본질에서 벗어난 ‘헛된 것’들이다.(p.173)

‘느림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불필요하거나 헛된 계획에 힘을 쏟지 않고

우리 사회 내에서 명예롭게 살 수 있는 수단’(p.247)이 된다.


그렇다면 문화를 향유하는 것은 또 어떤가?

문화의 과잉에 대한 경계심(P.202) 챕터를 특히 공감하며 읽었다.

모든 것의 문화화(p.210), 과열된 문화(p.216)의 역효과에 대한 우려를 말하고 있었다.

나 역시 문화라는 이름이 심지어 허영을 조장하는 면이 일부 있다고 생각한지 오래였다.

‘따라서 나는 인간적인 면을 중시하고 선택의 자유를 허용하는 문화, 그리고 조용하지만 문화에 대한 권리를 배제하지 않는 문화를 선호하는 편이다. 어떤 사회에서는 이런 요구들이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글을 읽지 않을 권리, 공연을 보러 가지 않을 권리를 자유롭게 누릴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은 야만적이라거나 하찮은 사람이라거나, 혹은 그 사회와 그 시대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은 사람으로 여기지지도 않을 것이다.’(p.216)

‘문화가 우리의 삶을 좀 더 고상하고 지적인 차원으로 회복시키고 싶어 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p.218)

도시계획 또한 마찬가지이다.

‘온갖 기능에서 자유로운 ‘빈 공간’을 자꾸 자꾸 없애지는 말았으면 한다.’(p.230)는 쌍소의 주장처럼

우리에게 빈 공간이 또한 느림을 누리는 일일 테다.


길을 오래 걷다 의자에 앉아 쉬듯

그리 중요하게 차지하고 있지는 않아도 내게 위로가 되는 의자들이

곳곳에 있기도 한 책이었다.

‘과거의 매력. 우리는 과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또 과거는 이제 전혀 위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몸이 그것을 경계할 이유도 없다.’(p.253)

나를 슬프게 하는 과거들이 있다.

밑줄 그은 문장은 내게 “옛날은 갔다”고 다시 말해주었다.

‘사실 나는 모든 만남이 거북하게 느껴졌다’(p.256)는 쌍소의 고백이 또한 나를 위로했다. 공원에서 ‘아직도 혼자만의 삶이 가능’한 공간이 있다는 반가움.

누구에게나 그런 공간이 필요하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휴식을 다룬 챕터(‘순박한 사람들의 휴식’)에서

가끔 늦잠이란 단어로 쓰이는 ‘살찐 아침’ 이라는 낱말은 퍽 매력적인 단어였다.

나는 그것을 충만한 아침이라 말하겠다.

천천히 하루는 여는, 차를 마시고 거닐고 책을 읽고 볕을 쪼이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될 혹은 무엇을 하든 상관없는,

곧바로 씻지 않아도 되는 아침, 그래서 충분하고 충만한 아침.

그것만으로도 지친 영혼은 쉬어갈 수 있다, 대단한 무엇이 아니어도.


수십 년을 살고도 이 생에 해낸 것이라고는 별 없다.

실력이 있는 것도 이룩해낸 것이 있는 것도 아닌

여전히 내 삶은 별 볼일 없는데, 나는 여전히 느리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그래도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고 책은 속삭였다.


‘내일 또 다른 하루가 태어날 것이다. (...) 빛이 저물 때까지 나는 그 빛과 함께할 것이고 밤이 새벽에 의해 찢겨질 때까지 그 밤과 함께할 것이다. (...) 내일, 다시 한 번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행운을 헤아려보며 만끽할 것이다.’(p.286)

다시 또 다른 아침이 올 것이다.

나는 그 하루를 내가 선택한 속도로 천천히 살아갈 것이다.

이제는 선험적 느림이 아니라 선택한 느림으로 말이다!(머리글; 느림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잘난 건 타고 나야 하지만 잘 사는 건 내가 선택할 수 있듯이.


오타라고 꼭 하나 보았다, 미처 보지 못한 또 다른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여럿이 교정교열을 하여도 두어 곳 오류 없는 책이 드문 줄 안다.

포도주에서도 똑같이 소박함이 ‘느껴지지’ 때문이다(p. 159),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고쳐진다면 정말 완벽한 교열!

아, '그것은 내가 존경받는 교수가 노동의 삶 한복판에서 인생을 만끽하는 환희였다.'(p.275)

여기서도 ‘내가 깊이 존경하는’으로 바뀌어야지 않나...

몇 군데의 문장은 여러 차례 읽고도 이해가 어려웠다.

원문의 아쉬움인지 번역의 아쉬움인지, 아니면 읽는 이의 어리석음 탓인지 모르겠지만.

‘문화가 권리가 아니라 의무가 되고 문화가 진부하고 무의미하다고 공언된 평범한 삶을 완전히 대체할 거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p.218)

이 문장도 아쉬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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