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어마한 깻잎을 가공 중이다, 어제에 이어.
마을의 형님이 나눠주신 것.
내 집에 많다고 그러기가 쉬운가.
따서 가라는 것도 아니고 따서 나눠 주신.
절반은 어제 조림을 하여 커다란 김칫통을 채우고,
오늘은 깻잎장아찌에 깻잎김치로.
김장을 마치고 메주를 쑨 뒤에 오는 느꺼움이 가득이다.
이웃에서 복숭아도 왔다.
내가 짓는 농사 아니어도 그리 닿는 먹을 것들이다.
산골살림의 풍성함이라.
기껏 한 해 한두 차례 손 보태고, 심지어 보태지 못했을 때조차
그렇게 채워지는 부엌 곳간.
교무실에 든다.
청소를 마칠 무렵 복사기를 고치러 사람이 오다.
“세상에, 이 모델이 아직 있었네요! 1996년인데...”
물꼬 살림들이 그렇다.
종이를 끌어내는 고무롤이 다 녹았던 것.
원래의 부품은 없고 기사가 직접 만든 것으로 대체한.
“앞으로 10년은 더 쓰는 걸로!”
그리 쓸 수 있을 것 같다.
고장 나도 버리지 말란다, 귀한 전시품이라나.
계자 앞두고 숙제 하나 또 했네.
글집이야 밖에서 인쇄해서 온다 하더라도
교사미리모임 자료이며들은 안에서 할 것이라.
하얀샘이 들어와 달골 아침뜨樂 회양목 씨앗을 따다.
그 씨앗으로 회양목을 키우려네.
조경 일을 하는 두엇의 손이 그리 물꼬의 꽃과 나무들을 같이 돌봐준다.
옴자의 한 부분을 회양목이 채우고 있었고,
거기 죽어버린 곳이 듬성하였는데,
씨앗으로 키운 회양목을 놓으려네.
가족 문제로 법정에 서야할 벗이 있다. 낼 출두라지.
처음부터 그리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살이라.
그 법을 난들 뭐 한 줄 알까.
그저 그의 삶을 지지하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응원이라고 몇 자 보냈네.
일찍 달게 자고 맑게 일어나시라,
따뜻한 마음으로 가시라(아이들 어릴 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던 그 때를 떠올리며),
온화하게 평화로이 앉아있으시라(뭐 하러 바보같이 스스로 지독에 있겠냐고) 했다.
8월 말 여기 걸음키로 하네.
반딧불들이 죽어갈 때쯤은 짬을 낼 수 있겠다 한다.
귀한 벗이 처음 물꼬에 오는 길, 설렌다.
‘받아’주어 ‘바다’라던가,
물꼬 바다로 우리 모이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