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14.흙날. 맑음

조회 수 234 추천 수 0 2019.10.28 17:22:02


서울 언저리는 비가 내린다 했다.

짙은 구름이 잠시 다녀가는 때가 있기는 하였으나

이 멧골은 화창했다.


운동장을 건너면서 화들짝 놀란다.

해가 한껏 기울어졌다.

가을이다. 그리고 겨울이 올 것이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이 맘 때도 밭을 매야 했다.

처서 지나며 풀이 성장을 멈춘다지만

백로 즈음 알곡이 여미는 때라

이때 하지 않으면 풀씨가 떨어져 흙 속에서 겨울을 나리라고

아침저녁 자라는 풀 때보다 더 부지런히 걸음을 쟀다.

어머니는 밥을 해야 했고,

방도 닦아야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또 밤을 밀어내셨다.

이 멧골의 삶도 밭을 매야 하고 밥을 해야 한다.

개밥도 줘야지, 대문도 쓸어야 한다.

강의 준비를 하고,

주말학교도 챙겨야지,

새 학기도 활발하게 이어가야지.

뭔가 할 일이 있어야 일어날 수 있다!

가을이다 싶으니 벌써 겨울을 이겨낼 수를 찾는 마음인가 보다...


한가위 연휴, 영화를 이어본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와 올리비아 이사야스 감독의 <퍼스널 쇼퍼>.

나약한 우리 생의 불안과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마스터>, 쉬운 영화는 아니었지만 자꾸 뒤가 돌아봐지는 영화.

이야기를 전하기보다 마치 풍경을 보여주는 것 같은.

전쟁과 가족들이 남긴 상처로 망가진 남자가 대상을 사랑하다 대상이 되는 이야기, 라고나 할까.

평생 마스터를 찾지만 그 마스터마저도 완전체가 아니며

그런데도 어느새 마스터를 닮아 마스터가 되지만 여전히 불안한 우리?

제목을 염두에 두자면 교주 역할을 하는 랭카스터가 주인공 같지만

그를 따르다 어쩌면 마스터가 되는 프레디(호아킨 피닉스 분)에 대한 영화.

절대 대칭되지 않는 일그러지는 얼굴,

어깨가 기울어져 절뚝거리는 주인공의 뒷모습,

그게 영화의 모든 것이라고 보여주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이런 걸 압도적이라고 하지.

상처 입은 영혼을 몸 구석구석으로 그리 다 보여주다니!

사랑(어릴 적 연인에 대한 사랑이든, 마스터에 대한 사랑이든)이 끝났다고

생이 끝나지는 않더라.

또 다른 사랑으로 우리는 두리번거릴 테지.

그래야만 할 테지.


몇 해 전 올리비아 이사야스 감독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보았더랬다.

어린 여자와 청년 여자와 나이든 여자가 나와

젊음을 향한 세 가지 색깔을 보여주던 영화였다.

거기 나오는 청년 여자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퍼스널 쇼퍼>의 주인공이었다.

네가 찾는 것이 누구냐 묻는 철학적 질문과

시간 내내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영화적 장치와 편집이

(단순히 전화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불안을 점점 극대화해간다든지)

돋보이는 영화였다.


내적으로 붕괴한 한 여자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마스터>랑 나란히 볼 수도.

<마스터>는 배우가, <퍼스널 쇼퍼>는 감독이 더 도드라져보였다.

이 영화들이 좋았던 건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자칫 어려운 게 좋은 것이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겠는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생각게 했기에.

흔들어주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끝까지 보는 이를 붙들고 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묻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무엇으로 생을 사느냐? 내 불안의 정체는 무엇이냐?

그 끝은 쓸쓸했고,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생이다 싶게 이해케 하더라.

그걸 날려버리는 것이 다정함(사랑이라고도 할)이리.

따스함을 기대고 가는 생일 것이라.

아님 너무 쓸쓸하잖아, 사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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