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24.불날. 맑음

조회 수 482 추천 수 0 2019.10.31 23:21:37


고개너머마을에서 송이버섯이 왔다.

비가 많아 버섯이 녹아버렸다는데,

그래도 찾아내는 이들이 있다.

노모를 모시고 홀로 사는 이가 산살림을 부지런히 해서 돈을 사고는 하였다.

아픈 노모를 위해 죽을 두어 차례 들여 주었더니

인사라고 귀한 송이가 그리 왔네.


큰 해우소 뒤란 창고안 물건들을 정리한다.

한 번씩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산처럼 쌓이고 만다.

사는 일이 그렇다.

부엌곳간을 청소한다.

먼지를 털고, 세간을 정리하고, 선반을 닦고, 바닥을 쓸고.

별일도 아니다. 그래도 두어 시간이 훌쩍.

표도 안나는. 그러나 하는 나는 안다!


이웃 마을의 폐교를 하나 둘러보다,

쓰임을 고민하는 이들이 조언을 구하기에.

100미터 달리기도 한 번에 안 됐을, 물꼬의 학교 마당보다도 작은.

한 종교인이 빌려 쓰다 방치해 둔.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 플라타너스만 살을 찌우고 있었다.

도시가 태어나고 죽고

학교가 세워지고 사라지고

사람이 태어나고 생을 건너고...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다람쥐도 더는 관심 없어 보이는 호두를 주워 모아두었다,

물꼬는 (호두가)넉넉하니까, 누군가 들릴 때 선물로 가져가시라 하고.


행복한 사람은 같은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그렇다,

안나 카레니나의 이 첫 문장은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첫문장이라고들 한다.

아마도 문장이 말하는 사람살이가 사실이어 그러할 듯.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가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민음사, 2009)

“불행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2009)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그런데 재밌게도 작품 안에서는 불행한 가정들이 외려 비슷한 이유로 불행을 겪고

독자가 예측하는 방향으로 가는 반면

행복한 한 가정이 생겨나고 나아가는 것에는 독자가 예측이 어려운 방식으로 이야기된다.

톨스토이의 첫 문장이 문득 곱씹어진 밤,

올 겨울 긴 밤에는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잡으리라 하지.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5042 2019.10. 5.흙날. 흐림 옥영경 2019-11-24 416
5041 2019.10. 4.쇠날. 맑음 / 여민락교향시 초연 옥영경 2019-11-24 471
5040 2019.10. 3.나무날. 비 내리다 갬 옥영경 2019-11-23 751
5039 2019.10. 2.물날. 비 옥영경 2019-11-23 669
5038 2019.10. 1.불날.흐림 옥영경 2019-11-22 440
5037 2019. 9.30.달날. 맑음 / 어머니는 남는다 옥영경 2019-11-22 419
5036 9월 빈들모임(2019. 9.28~29) 갈무리글 옥영경 2019-10-31 2033
5035 9월 빈들 닫는 날, 2019. 9.29.해날. 맑은 날 옥영경 2019-10-31 504
5034 9월 빈들 여는 날, 2019. 9.28.흙날. 잠깐 빗방울 댓 옥영경 2019-10-31 495
5033 2019. 9.27.쇠날. 해 나왔다 오후 사라진 / 두 발의 총성 옥영경 2019-10-31 532
5032 2019. 9.26.나무날. 흐리다 살짝 해 / 아고라 잔디 옥영경 2019-10-31 473
5031 2019. 9.25.물날. 잠깐 볕 옥영경 2019-10-31 607
» 2019. 9.24.불날. 맑음 옥영경 2019-10-31 482
5029 2019. 9.23.달날. 갬 옥영경 2019-10-31 497
5028 2019. 9.22.해날. 비바람 옥영경 2019-10-31 459
5027 2019. 9.21.흙날. 비바람 / <죽음>(열린책들, 2019) 옥영경 2019-10-31 451
5026 2019. 9.20.쇠날. 흐려가는 오후 / 굴착기 옥영경 2019-10-30 542
5025 2019. 9.19.나무날. 맑음 / 낭독회, 그리고 하루 옥영경 2019-10-30 443
5024 2019. 9.18.물날. 맑음 / NVC 옥영경 2019-10-30 482
5023 2019. 9.17.불날. 맑음 옥영경 2019-10-29 717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