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24.불날. 맑음

조회 수 564 추천 수 0 2019.10.31 23:21:37


고개너머마을에서 송이버섯이 왔다.

비가 많아 버섯이 녹아버렸다는데,

그래도 찾아내는 이들이 있다.

노모를 모시고 홀로 사는 이가 산살림을 부지런히 해서 돈을 사고는 하였다.

아픈 노모를 위해 죽을 두어 차례 들여 주었더니

인사라고 귀한 송이가 그리 왔네.


큰 해우소 뒤란 창고안 물건들을 정리한다.

한 번씩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산처럼 쌓이고 만다.

사는 일이 그렇다.

부엌곳간을 청소한다.

먼지를 털고, 세간을 정리하고, 선반을 닦고, 바닥을 쓸고.

별일도 아니다. 그래도 두어 시간이 훌쩍.

표도 안나는. 그러나 하는 나는 안다!


이웃 마을의 폐교를 하나 둘러보다,

쓰임을 고민하는 이들이 조언을 구하기에.

100미터 달리기도 한 번에 안 됐을, 물꼬의 학교 마당보다도 작은.

한 종교인이 빌려 쓰다 방치해 둔.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 플라타너스만 살을 찌우고 있었다.

도시가 태어나고 죽고

학교가 세워지고 사라지고

사람이 태어나고 생을 건너고...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다람쥐도 더는 관심 없어 보이는 호두를 주워 모아두었다,

물꼬는 (호두가)넉넉하니까, 누군가 들릴 때 선물로 가져가시라 하고.


행복한 사람은 같은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그렇다,

안나 카레니나의 이 첫 문장은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첫문장이라고들 한다.

아마도 문장이 말하는 사람살이가 사실이어 그러할 듯.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가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민음사, 2009)

“불행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2009)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그런데 재밌게도 작품 안에서는 불행한 가정들이 외려 비슷한 이유로 불행을 겪고

독자가 예측하는 방향으로 가는 반면

행복한 한 가정이 생겨나고 나아가는 것에는 독자가 예측이 어려운 방식으로 이야기된다.

톨스토이의 첫 문장이 문득 곱씹어진 밤,

올 겨울 긴 밤에는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잡으리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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