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오후 세 시간은 꼭 바깥 노동.
다른 집에서 잔디를 놓고 남은 게 좀 왔다.
사이집 남쪽 마당과 서쪽 마당에 잔디를 심다.
땅을 고르고 돌을 골라내기 여러 날이었더랬다.
봄은 돼야 어디고 잔디가 생기겠다 싶더니
마침 그렇게 남아돈 잔디가 있었더라.
양도 하루 세 시간 만치의 일이었네.
해 있을 때 철쭉과 느티나무 가장자리에도 잔디 몇 조각 덧붙여졌네.
서둘러 학교로 먼저 내려가
밀가루 반죽을 하여 떼며 수제비를 끓여냈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의 박세길 선생과 자리하다.
80년대 후반 그 책은 우리 세대 혹은 그 시대의 필독서였다.
‘민중’을 말하던 시대에 민중 중심이었던 역사서였으니까.
88년에 그 책을 쓴 후 2019년 그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4차산업, 4차산업 하는데, 이 시기를 3차산업의 2단계 정도로 봐야 한다고 포문을 열다.
농업에서 공업으로의 이동인 1차산업시대,
전기를 원동력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2차산업,
ICT를 기반으로 한 경제지능화의 3차산업,
그리고 4차산업하면 떠오르는 AI자율주행, 3D프린트 같은 자동화,
이런 4차산업시대에 세계화를 어떻게 대처하고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4차산업시대, 인간중심경영’
인간중심이라... 허망했다.
대개 어떤 이야기의 결론이 허망한 이유는 두 가지일 것.
한 가지는 너무 당연하거나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일 때,
다른 하나는 대안 없는 원론만 반복하고 있을 때.
자동화의 이익이 노동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예컨대 이마트의 자동화계산대 같은)
고스란히 사용자의 배를 불리는 이 시점에
나는 어떤 대답을 그에게 바랐던 걸까?
이 같은 질문에 대해 그는 말했다,
그런 세별 대응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그래서 각개전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해결이 필요했다고.
치악산에 짐싸들고 들어가서 가져온 결론이라.
자신의 의견에 대한 사회적합의를 도출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는데
그건 또 어떻게 하려는 걸까?
90분은 아주 짧은 시간.
그렇지만 진보 쪽에서 중도우파로 간 느낌은 짙더라.
일단 최근 나온 그의 책을 읽으리라.
나 역시 이 시대 무엇을 어떻게 할까를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물꼬야말로 교육에서 원론을 말하고 있잖은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구체적 해법사례를 말할 때
정작 나야말로 철학을 말하고 있었다.
<내 삶은 내가 살게...>도 그 예인 셈이다.
그것 역시 원론이거나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답습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누구에게는 허망함일 수 있을.
질문이 남는 자리가 좋더라.
생각해보겠다. 이 시대에 나는, 물꼬는 정녕 무엇을 하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