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19.나무날. 맑음

조회 수 531 추천 수 0 2020.04.16 22:08:16


 

아침부터 세찬 바람이었다. 밤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간밤 물꼬 누리집이 먹통이었다.

영문을 모르고 도대체 이 일을 어디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인가 당황하며

한밤중 하다샘을 호출하다.

도메인을 관리하는 쪽의 서버가 저녁에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것.

새벽에야 복구되었다.

 

품앗이 들일을 가다.

올 봄학기에는 마을이고 멀리고 들일에 손보탤 일이 없었을 것인데,

코로나19로 개학이 늦춰지면서 또 그렇게 짬이 났다.

인근 도시의 가정집 두 채 꽃 마당을 일구는 자리였다.

일찍이 돌격대라고 이름을 붙이기까지 하며 여러 차례 모여 일을 했던 손들이다.

흙을 패고 돌을 골라내고 벽돌 길을 놓고, 꽃밭에 벽돌 울타리도 만들고,

한켠에선 울타리 나무와 마당에 몇 가지 묘목도 심고,

그리고 나머지 마당에는 잔디를 심고 사이사이 흙을 덮었다.

종일 마치 돌풍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자주 바람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려야 했고,

더 자주 날려드는 흙을 피해 눈을 감아야 했다.

가끔 빨강머리 앤이라 나를 부르는 이들이 있는데,

아마도 두 갈래로 땋은 머리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그 바람 속에서 정말 앤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아가는 이 길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 책 어딘가에서 읽었던 구절이었다,

사내애를 기다리던 초록지붕 집에서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던 길목에서였던가.

즐기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으면 항상 즐길만한 것을 찾을 수 있다.

물론 마음을 아주 굳세게 먹어야 하지만...’

즐거운 일터였다, 굳게 마음 먹어야만 할 것까지도 아니었던.

 

품앗이 샘 하나의 안부 전화가 들어왔다.

열 살이었던 아이는 자라 나이 서른이 넘어가고 있다.

어느새 말도 툭툭 놓으며 집안사람처럼 쌓아가는 정이라.

이번 학기는 풀 가동이다. 한 초등학교 분교 특수학급 담임 노릇 해야 해.

 주중엔 분교에, 주말엔 물꼬 주말학교 일정 그대로 돌리고.”

그거 왜 해? 해야 해? 돈을 많이 줘?”

아니.”
그런데 왜 해?”

내가 가서 만나야 할 애들이 있다잖여.”

그렇다. 아이들이 있으니까!
물꼬의 일들이 그러하듯 돈은 돈의 길이 있고 행위는 행위의 길이 있다.

많든 적든 임금은 임금의 길대로, 가르치는 건 오직 가르치는 길대로 흘러갈 것.


내일도 새벽부터 품앗이 들일을 나서야 하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1534 2020 여름, 166 계자(8.9~14) 갈무리글 옥영경 2020-08-20 561
1533 2019. 7.30.불날. 맑음 / 164 계자 준비위 옥영경 2019-08-22 561
1532 2023. 8. 5.흙날. 맑음 / 172계자 미리모임 옥영경 2023-08-07 560
1531 2019. 9.14.흙날. 맑음 옥영경 2019-10-28 559
1530 2019. 7.17.물날. 흐림 / 뭐, 또 벌에 쏘이다 옥영경 2019-08-17 559
1529 2023. 8.24.나무날. 몇 차례의 소나기 / 대둔산(878m)-동학최후항전지가 거기 있었다 옥영경 2023-08-28 558
1528 2022. 4.19.불날. 맑음 / 물꼬에 처음 왔던 그대에게 옥영경 2022-05-16 558
1527 2022. 4.16.흙날. 맑음 / 달골 대문 쪽 울타리 옥영경 2022-05-07 558
1526 2020. 4. 5.해날. 맑음 옥영경 2020-05-28 557
1525 2019. 9.24.불날. 맑음 옥영경 2019-10-31 557
1524 2019. 8.27.불날. 안개비 / 당신이 내게 하늘을 주었을 때 옥영경 2019-10-11 557
1523 2019. 8.22.나무날. 맑음 / 두 번을 놓치고, 한 번을 놓칠 뻔한 옥영경 2019-10-08 557
1522 2023.10.17.불날. 맑음 / 의료자원에 대해 생각하다 옥영경 2023-10-29 556
1521 ‘우리끼리 계자 5박6일’(8.13~18) 갈무리글 옥영경 2022-08-26 555
1520 2020. 3.21.흙날. 맑음 옥영경 2020-05-03 555
1519 2019. 8.21.물날. 흐림 / 소나무 전지 옥영경 2019-09-24 555
1518 2019. 7.26.쇠날. 비 옥영경 2019-08-22 555
1517 2019.11.15. 흐리다 도둑비 다녀간 / 90일 수행 여는 날 옥영경 2019-12-31 554
1516 2019.10. 8.불날. 맑음 / 기본소득, 그리고 최저임금 옥영경 2019-11-27 554
1515 2019. 9.22.해날. 비바람 옥영경 2019-10-31 554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