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19.나무날. 맑음

조회 수 542 추천 수 0 2020.04.16 22:08:16


 

아침부터 세찬 바람이었다. 밤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간밤 물꼬 누리집이 먹통이었다.

영문을 모르고 도대체 이 일을 어디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인가 당황하며

한밤중 하다샘을 호출하다.

도메인을 관리하는 쪽의 서버가 저녁에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것.

새벽에야 복구되었다.

 

품앗이 들일을 가다.

올 봄학기에는 마을이고 멀리고 들일에 손보탤 일이 없었을 것인데,

코로나19로 개학이 늦춰지면서 또 그렇게 짬이 났다.

인근 도시의 가정집 두 채 꽃 마당을 일구는 자리였다.

일찍이 돌격대라고 이름을 붙이기까지 하며 여러 차례 모여 일을 했던 손들이다.

흙을 패고 돌을 골라내고 벽돌 길을 놓고, 꽃밭에 벽돌 울타리도 만들고,

한켠에선 울타리 나무와 마당에 몇 가지 묘목도 심고,

그리고 나머지 마당에는 잔디를 심고 사이사이 흙을 덮었다.

종일 마치 돌풍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자주 바람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려야 했고,

더 자주 날려드는 흙을 피해 눈을 감아야 했다.

가끔 빨강머리 앤이라 나를 부르는 이들이 있는데,

아마도 두 갈래로 땋은 머리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그 바람 속에서 정말 앤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아가는 이 길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 책 어딘가에서 읽었던 구절이었다,

사내애를 기다리던 초록지붕 집에서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던 길목에서였던가.

즐기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으면 항상 즐길만한 것을 찾을 수 있다.

물론 마음을 아주 굳세게 먹어야 하지만...’

즐거운 일터였다, 굳게 마음 먹어야만 할 것까지도 아니었던.

 

품앗이 샘 하나의 안부 전화가 들어왔다.

열 살이었던 아이는 자라 나이 서른이 넘어가고 있다.

어느새 말도 툭툭 놓으며 집안사람처럼 쌓아가는 정이라.

이번 학기는 풀 가동이다. 한 초등학교 분교 특수학급 담임 노릇 해야 해.

 주중엔 분교에, 주말엔 물꼬 주말학교 일정 그대로 돌리고.”

그거 왜 해? 해야 해? 돈을 많이 줘?”

아니.”
그런데 왜 해?”

내가 가서 만나야 할 애들이 있다잖여.”

그렇다. 아이들이 있으니까!
물꼬의 일들이 그러하듯 돈은 돈의 길이 있고 행위는 행위의 길이 있다.

많든 적든 임금은 임금의 길대로, 가르치는 건 오직 가르치는 길대로 흘러갈 것.


내일도 새벽부터 품앗이 들일을 나서야 하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1494 173계자 사흗날, 2024. 1. 9.불날. 흐림 옥영경 2024-01-11 565
1493 2023. 8.14.달날. 맑음 / 노력은 우리 어른들이나 좀 할 것 옥영경 2023-08-16 565
1492 2023. 3.18.흙날. 살짝 퍼진 해 옥영경 2023-04-05 565
1491 2020. 4. 5.해날. 맑음 옥영경 2020-05-28 565
1490 2019. 7.10.물날. 비, 여러 날 변죽만 울리더니 옥영경 2019-08-17 565
1489 2020. 3.21.흙날. 맑음 옥영경 2020-05-03 564
1488 10월 빈들모임 여는 날, 2019.10.26.흙날. 맑음 옥영경 2019-12-10 564
1487 2019.10.15.불날. 잠깐 볕. 흐리고 기온 낮고 바람 불고 옥영경 2019-11-27 564
1486 2021 물꼬 연어의 날; Homecoming Day(6.26~27) 갈무리글 옥영경 2021-07-23 563
1485 2022. 4.19.불날. 맑음 / 물꼬에 처음 왔던 그대에게 옥영경 2022-05-16 562
1484 2023. 8.26.흙날. 맑음 / ‘멧골 책방·2’ 여는 날 옥영경 2023-09-03 561
1483 2023 여름, 172계자(8.6~11) 갈무리글 옥영경 2023-08-14 561
1482 2019. 9. 5.나무날. 소나기라 할 만치 / 가을학기 여는 날 옥영경 2019-10-16 560
1481 2019. 8.23.쇠날. 맑음 / 우리는 아이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있는가? 옥영경 2019-10-08 560
1480 2020.11.11.물날. 맑음 / 흙벽에 목천 붙이다 옥영경 2020-12-15 559
1479 172계자 닫는 날, 2023. 8.11.쇠날. 짱짱 옥영경 2023-08-13 558
1478 172계자 나흗날, 2023. 8. 9.물날. 끊어지지 않는 빗줄기 옥영경 2023-08-11 558
1477 2021.10.13.물날. 낮 서울 맑음, 밤 대해리 비 옥영경 2021-12-08 558
1476 2019. 6.19.물날. 는개비로 시작한 아침, 그리고 갠 옥영경 2019-08-07 557
1475 2024. 4.13.흙날. 맑음 옥영경 2024-04-23 556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