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 6.불날. 맑음

조회 수 346 추천 수 0 2020.11.18 22:07:24


 

물꼬는 엊그제부터 111일까지 4주간 위탁교육 중.

어제보다 10분을 당겨 아이들을 깨우고 창고동으로 건너간다.

몸을 풀고 대배와 호흡명상.

모든 끼니를 학교 가마솥방에서 먹는 이곳이지만

이번 일정에는 아침을 햇발동에서 가볍게 먹고

오전 활동은 달골에서 한 뒤 낮밥부터 학교에서 보내기로.

 

10학년 팥쥐는 햇발동 거실에서 온라인수업을 듣고,

11학년 콩쥐는 같이 밭으로.

어제부터 도라지밭을 매는 중.

곧 겨울, 죽을 풀들이지만 풀씨를 그 밭에 덜 떨어뜨리려.

돌보지 못하고 있던 밭을 돌보는 시간으로도 쓰는.

땅이 어찌나 야문지 그것을 쪼개 부드럽게 하는. 봄밭을 만들 듯이.

어디 놉을 나간 일꾼들처럼 차양 모자들을 하나씩 쓰고

할머니들이 밭에서 깔고 앉는 방석을 하나씩 차지하고.

멧골 산 아래 밭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들으며

절로 나오는 노래를 부르고

친구처럼 온갖 이야기를 가져와 나누고

때로 침묵하며 수행에 다름 아니게 풀을 맸다.

 

11:30 밭에서 나와 학교로 내려와서 낮밥을 준비하다.

한 아이의 온라인 수업이 끝나는 정오에 맞춰 걸어 내려온 아이들.

몇 가지 제안에 아이들은 입 맞춰 잔치국수를 불렀지.

누구라도 편안한 음식이라.

아직 채소값이 높은 때나 귀한 애호박이 여럿 있더라.

물꼬 밭에서도 나오고 이웃 할머니가 들여 주기도 한.

호박을 채 썰어 데쳐 무치고 달걀을 분리하여 하얗게 노랗게 부치고.

국물을 내고 건진 것들을 볼까; 마른 새우와 멸치와 다시마, , 양파, , 통마늘.

가벼운 국수여도 충분할 영양이라.

 

오후에는 책방에서 교과학습.

한 명은 4시까지 온라인수업이 이어지고.

4시에 모여 책방 거닐기.

몇 권을 책상에 쌓아 필수목록으로 내놓고,

나머지는 자기 관심도에 따라 꺼내들기로.

저녁마다 1시간 이어갈 책읽기라.

 

아이들은 저녁밥상을 거든다고 감자껍질을 벗겼다.

물꼬 밭에서 나온 자잘한 감자들,

밥하는 이가 하고 앉았으면 더딜 것들을

가마솥방에서 사내애 둘이 놀이삼아 일삼아 어느새 한가득 해서 부엌으로 들여 준다.

밥상을 물리고 아이들이 설거지를 하다.

 

멧골의 저녁, 거실에서 책들을 잡았다.

갈무리엔 제 읽은 책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콩쥐는 <전태일>을 읽는 감동을 전한다.

80년대 신입생이었던 대학에서 전태일과 광주항쟁 비디오는

자신이 그간 알고 믿었던 세상을 뒤흔들었고

우리는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었더랬지.

이제 그의 이야기를 이 친구들이 읽는다.

버스비를 아껴 풀빵을 여공들에게 나누던 전태일은

내 생애 가장 강렬했던 인물상 하나였다.

이곳에서의 마음단련 몸단련 위에 활자도 책 속에서 나와 우리 삶으로 들어오기를.

 

하루재기 뒤 손빨래 안내.

씻으러 들어간 걸음에

대야에 물을 받고 양말과 속옷을 적시고 비누질을 하고 비비고 헹구기.

수행 하나로.

이고 강 가 나가 방망이질해서 빠는 수행까지는 못해도.

날적이를 쓴 뒤 각자 제 시간을 쓰다 23시에 불을 끄기로.


시간이 지나서도 좀 더 켜져 있던 불이 꺼진 뒤 아래 위층을 돌아보다.

욕실을 여니 선반 위 물건들이 여기저기 팽개치듯 놓여있고,

샤워기는 바로 틀면 그만 쏟아지게 달렸고(벽 쪽으로 젖혀야!),

바닥에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수챗구멍에도 덩어리.

내일은 욕실정리를 안내해야겠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우리는 이곳에서 일상을, 순간순간을 잘 견지하며 자기 생을 채워가는 연습을 할 것이다.

치우고 나와 책상 앞에 앉는다.

 

나부터 물꼬에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일이 눈앞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일 테지.

더하여 온 정성으로 밥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위한 단단한 몸과 마음을 기르는 걸 돕고

삶의 방향을 같이 찾아갈 날들이리.

 

아침: 송편과 홍시와 모과차

낮밥: 함흥국수

저녁: 잡곡밥과 만두전골, 줄기김치, 미역무침, 오징어채, 감자조림, 두부김치, 그리고 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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