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소년의 팔뚝을 기억하다!

조회 수 1264 추천 수 0 2003.11.04 00:15:00
적도를 지나 남반구 한 섬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또 급하게 영동으로 향하다.
넬슨 공항 근처의 싸고 믿을만한 숙박 시설에서 하루는 유해야 하므로,
나는 윌리엄이라는 관리자를 만나기 전에 영동 교장선생을 먼저 만나야했다.
하지만,
빠른 서신을 마다하고 굳이 발품을 판 것은 전화선으로 전해오는 그이의 우정어린 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똥인지 된장인지 이제 막 구분하기 시작한 고만고만한 아이 하나 데리고 그 큰 일을 겪어내고 있는 그이는 때로 가녀린 모성으로 미약한 개인으로, 같은 못난 놈 만나 뒤통수만 봐도 정겨운 회한을 털어내고싶었는지도.
기차를, 버스를 서둘러 못 탈 이유는 없다.

군불 땐 방에서 자글자글 잠을 쪼개가며
주거니받거니 무슨 말이 그리도 많았을까. 그러니
새우젓에 다진 풋고추 넣은 아침 국밥이 그리 달지.

아침에 할 일은 겨우내 아궁이에 넣을 땔감을 정리하는 일.

사택 세 채 중 본채는 아직 아궁이를 고수하고 있다.
삼년을 내리 표고버섯 길러내고 장렬하게 말라져간 시커먼 나무들이 몽당몽당
마당 한 구석에 가득이다.
방과후 공부 가르친 아이들의 월사금으로, 혹은 밭일 논일 거들어준 삯대신으로
운동장 거기까지 오신 땔감들.
창고까지 모시기에는 사뭇 손이 간다. 운동장 가에서 기세좋게 포개진 땔감들은 상당한 몸값을 요구해온다.

선생들 둘과 합세한다.

하나하나 던져 계단을 통과하고, 다시 수레로, 수레에서 창고 입구로, 다시 가로세로 포개고 뉘고 올리고....
시간을 죽이는 이 행위들이 과연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행위와 맞바꿈할 부피, 밀도를 지닌 또 다른 행위는 무엇인가?
정녕 만족하는가?

뜨거운 커피와 우유를 마시며 초코파이 비닐을 뜯는다.
젊은 선생들이 웃는다.
앞으로 일년간 운명을 함께 할. 시간표 속에서 감정과 호흡을 섞을 그들이 낡은 작업복을 입고 웃고있다.

자의식의 한가운데서 뒷골 뻣뻣해지던 나의 치기도 잠시 그들을 따라 휴식을 취한다.
초코파이가 너무 달착지근해서 일까?
커피의 간이 안성맞춤이어서?
학교 여기저기 낙하, 낙하 은행나무 노란잎들이 뒹굴어대도 하나 쓸쓸하지 않다.
그래서 짜장밥으로 점심을 배터지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담요 덮고 낮잠을 오지게도 잤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을을 종종 지나치는 버스를 잡기위해 한기드는 바람 속에 내복바지위에 청바지 덧입고 삼십분을 먼저 기다리고 섰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미처 아이들과 수업중인 젊은 두 선생에게 멀리서 눈인사만 하고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학교 문앞에서 손 흔들어주던 교장선생이 당찬 씨앗품은 한 여성으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이의 손을 함껏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하므로, 땔감을 창고에 넣는 작업이 오늘날 삶의 저항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들과 나의.
기꺼이!

그렇기때문에 나는 오늘 밤, 네덜란드를 구한 그 장렬한 팔뚝을 잠시 기리기 위해 빈 여백을 축내는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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