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을 도우러 남도에서 온 집안 어르신이랑 아침뜨락을 걸었다.

어른들 눈에는 거기 바친 시간이 막 쏟아지시는 거라.

묵정밭이 이리 변하자면 얼마나 욕을 봤겠냐셨다.

고마웠다.

땀 흘린 곳을, 날마다 마음 닦는 곳을, 같이 걸어서 좋았다.

 

보라색 튤립 두 송이가 상에 놓였다. 곱다.

꽃다발도 한아름이 닿았다. 찻상에 꽂았다.

어제 미리 사람들 모여 케잌도 같이 잘랐다.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먹고,

어제 삶던 콩을 다시 이어 삶았다.

올 겨울 메주를 쑤지 않는 대신 이 콩으로 된장 양을 늘리기로 한다.

실상 양을 많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된장이 너무 뻑뻑했던.

콩이 카라멜 같은 색을 낼 적 불을 끄고 으깼다.

하룻밤을 아랫목에 띄워서 쓰자 하다가 그냥 섞기로 했다.

이미 발효된 된장에 기대기로.

콩 삶은 물도 더하고, 콩간장도 떠서 같이 좀 섞었다.

 

택배가 왔더랬다. 지나치게 좋은 패딩이었다.

도대체 누구인가? 생일인 줄 알고 보낸 걸까?

우리는 가능한 모든 인물들을 소환했다.

한 사람으로 압축되었는데, 그렇다고 당신이 이런 거 보냈소 하고 물을 수는 없었다.

혹 아니라면 난처하실 수 있으리.

뭐 곧 소식이 오겠지, 했던 어제였다.

문자가 닿았다.

- 배추는 잘 절여지고 있겠지? 택배가 하나 갈겨. 옷이 품질은 아주 좋은데

 한 가지 색깔, 한 가지 치수 밖에 없어서 값이 아주 싸!

 남 주기 아까운데 주변에 이 사이즈, 이 색깔 감당되는 사람이 너랑 나밖에 없다! ㅋㅋㅋ

 똑 같은 걸로 하나씩.

 혹시 너무 딱 맞더라도 걍 입기.

 딱 맞으면 바람구멍 없어 더 따시니께 ㅎㅅ

부담될까 사려 깊게 살핀 흔적들을 읽었다.

이곳의 추위를 늘 걱정해주는 마음도 보았다.

늘 사람을 즐겁게 하는 그의 흰소리에 또 한바탕 웃었다.

교복, 체육복, 과티 말고 친구랑 같은 옷을 그렇게 입어본 적이 있었던가.

즐거웠다. 참으로 훌륭한 선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선물인 것만도 이미 훌륭한 걸...

나는 늘 그로부터

사는 일에 대한 지혜를 얻고, 적당하고 적절한 처신을 또한 배운다.

사람은 내 편인 사람 하나만 있어도 내일을 살 수 있다.

그는, 마치 유배지에서 날마다 자신을 끌어올리는 그런 힘을 내게 준다.

복이다.

 

손님들이 왔다. 물꼬의 논두렁이기도 한 선배의 어머니와 선배의 누이들.

며칠 전 어머니께 안부를 여쭙느라 전화를 넣었는데, 영동으로 땅을 보러 온다셨다.

그런데 그 땅이 이 마을 대해리인 거다. 그것도 물꼬랑 4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2시 물꼬에서 보자던 약속이었으나 아침 절에 전화 넣었다.

정오쯤이라면 국수를 내겠노라고.

어머니가 밖에서 맛난 것을 대접해주신다는 걸 물꼬는 그런 이상한 거 안 먹는다 농하며.

꽃과 귤과 배추와 무며들이 부려졌다.

생일잔치에 뜻밖에 함께하셨다고도 즐거워하셨네.

차를 달여냈고,

아침뜨락도 돌아들 보고 가셨더라.

 

방문객들을 보내고 늦은 오후에야 움직였다.

남도에 다시 집안 어르신을 모셔다드렸다.

짐도 없이 홀몸인데 기차타고 버스타고 가신다는 걸 기락샘이랑 굳이.

돌아오며 그랬네.

그니까, 비싼 김치여! 모시고 오고 가고, 어르신 용돈 드리고...”

아무리 맛있고 싸다해도 사서는 아이들 못 멕인다 생각는 물꼬의 김치라.

땔감도 있고, 연탄도 있고, 기름도 있고,

고추장 된장 간장 있고, 쌀 있고, 그리고 김장김치가 있다.

이제 눈에 갇혀도 걱정 없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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