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해리는 아침 두 차례 소나기 다녀갔다 했다. 번개도 치고.

빨래방에서 널린 이불을 들여다 갰다고.

 

설악 아래서 열하루 일정, 오늘이 엿새째.

하루걸러 산에 들어 산꽃 보고 나물 뜯고 걷고.

오늘은 시작을 조금 느슨하게,

택시를 불러 새벽 5시 한계령 휴게소에 닿았다.

군인들이 썼다던 계단은 일반 계단 높이보다 매우 높아

들머리부터 만만치 않았다.

그렇더라도 오늘의 여정이 길고 길 줄은 미처 몰랐네, 이때만 해도.

 

돌에 새긴 공사 유공자들 이름에서 패 내진 이름자가 몇 있었다.

10.26 사건 관련자들이었다.

새긴 이름도 역사였고, 깨낸 자리도 역사였네.

열여덟 살 오색 젊은이가 한계령 오르는 구절양장을 내려다보며 시를 썼다던 바위에서

30년 뒤 그 당사자와 같이 앉아 다시 운무에 싸인 고개를 보았다.

등산객들이 많았다.

한계령삼거리에 이르기 얼마 전 쯤 우리가 걸어온 능선을 볼 수 있는,

이름도 없는 한 바위군락에 올라 왼편으로 가리능선 쪽과 오른 편으로 서북능선을 둘러보고

첩첩이 둘러친 봉우리들을 보았다.

망대암봉 쯤으로 언젠가 이름도 달겠다 싶었다.

무어라 이름 붙였지만 돌아오니 까마득하네.

거기서 오늘에야 알았더라지, 삶은 달걀을 왜 소금이랑 먹는지.

목이 멕히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계령에서 등산로를 빠져나와 나물밭으로 들었다.

나물을 뜯고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시인은

전문가답게 구리대와 명이를 중심으로 뜯고(순한 당귀도)

곁다리인 나는 눈에 잘 익은 곰취와 참취와 참나물을 주로 뜯었다.

나물이 어찌나 좋던지.

어디께는 아주 참취밭이었다.

길이 없는데 길이 있었다. 나물꾼들이 밟고 다니는.

그래도 나물을 뜯는 이들보다 나무와 풀이 더 빨리 자리를 넓히는 숲,

우리는 덤불을 헤치고 가지를 꺾으며 나아갔다.

 

끝청에 올라 멀리 가리봉, 주걱봉, 귀때기청봉을 건너다 보았다.

동행하고 있는 시인이 박영석 대장과의 인연을 꺼냈다.

멀리 네팔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그를 기리는 돌무덤 사진을 찍고

안나푸르나1봉 남벽을 오르다 결국 돌아오지 못했던 그의 이름을 외쳐 불렀는데,

그의 청년시절을 오늘 설악산 끝청봉에서 듣고 있었다.

용아장성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귀때기청봉, 오른 쪽으로 공룡능선의 1275봉이 보였다.

그 일대가 바로 하늘의 꽃밭이라는 천화대.

어쩌다오늘 내리 백담계곡까지 걸어보자 하였네.

이번 설악산행에 좀 더 많이 걷는다면 아무렴 다음 설악산 걸음이 수월하잖겠는가 하고.

(가을과 봄과 여름을 건너 책을 써갈 참)

다시 걷고 걸었다.

중청대피소를 옆으로 두고 소청으로 나무 계단을 열심히 밟아 내렸다.

오른쪽으로 공룡능선과 신선대를 한껏 눈에 담고

소청대피소에서 비로소 화장실에서 편히 볼일을 보고 목도 축이고.

소청봉과 끝청을 잇는 능선을 치어다보며

끝청에서 내리 오면 불과 얼마 아닐 길인데

길이 없으니 능선 너머로 대청이 보이는 쪽으로 돌아오므로 멀기도 한 길.

가파른 길을 내려오는데,

홀쭉이와 뚱보라 부를 만한 친구 둘이 서툰 발을 옮기고 있었다,

덩치가 좋은 젊은이 쪽이 쥐가 났다 했다.

우리 걸음은 바쁘고, 저만치 시인도 앞서 갔는데,

안 되겠다, 어떻게 모른 척 하나, 배낭을 던지고 간단한 치료를 도왔다.

이 걸음들이라면 구곡담계곡도 길 터이니 산 아래 이르지 못하고 날이 저물텐데

절이나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도움을 청해야들 하겠고나.

두 청년을 뒤로 하고

봉정암으로 바삐 들어섰다가 오세암으로 길을 잡았다.

저녁 해가 불덩이였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세암에서 나오는 저녁 독경이 골짝을 채웠다.

오세암에 얽힌 설화는 정채봉의 동화로 널리 알려졌지.

그 동화를 먹고 자란 우리 세대는

그래서 더욱 오세암을 이번 걸음에 빠뜨릴 수가 없었는지도.

용아장성 아래에서 수렴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어디께서

갑자기 서늘한 기운 덮쳐 왼편으로 고개 돌리는데

시커멓게 죽은 나무가 섰다.

그런데 거기 바람이 휘도는 게 보이는 거다.

영령인가 했다.

이른 봄 거기서 여자 등산객 하나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던가.

 

오세암을 지나 바삐 영시암으로 향한다.

아직 남은 길. 그런데 벌써 다 왔는가,

저 아래 불빛이다!

자세히 보니 나뭇잎 사이의 하늘빛이 비친 풍경이었다.

혹부리영감이며들이 보았던 도깨비불도 저런 것 아니었을까.

불 꺼진 영시암.

터만 있던 곳에 절이 들어서고, 앞으로 계곡이 좋았다.

보여서가 아니라 불빛을 비춰 본.

길이 넓어졌으나 울퉁거리는 돌들.

동행인이 앞서 손전화를 켰다.

그 빛을 따라 가다.

왼편으로 계곡을 둔 길이 넓어 다행하였다.

 

백담사에 밤 10시에야 닿았다.

아직 용대리까지 걸어야 하는 걸.

용대리에서 백담사 쪽으로 굳게 문이 닫혔을 시간.

지역통인 시인이 몇 차례 전화를 돌렸다.

그 안의 한 시설에서 대피소로 전화를 넣고 국립공원 측에서 문을 열어주고

원통의 택시는 그렇게 백담사 주차장까지 들어왔다.

산을 나오고 다시 30분이 흐른 뒤였다.

용대리, 황태 덕장이 준 부는 리 단위에 철물점이 둘이나 있었고,

뭐도 뭐도 읍소재지 못잖게 있다고 했다.

 

11시에야 오색으로 돌아오다.

걸음을 따져보니 20km였더라.

 

 

* 국립공원에서 나물 채취는 금지되어 있으나

그것을 생업으로 하는 지역주민에게는 암묵적 동의 혹은 배려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설악산 아래에서 보낼 열하루의 날들 가운데 산에 드는 날은 지역주민과 동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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