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3.흙날. 비

조회 수 338 추천 수 0 2021.07.30 23:49:58


 

첫차를 타고 나가려는 진주샘이 2층에서 내려왔다.

바나나를 우유에 갈아내고 빵을 굽고

만든 요걸트에 블루베리를 넣어 내놓았다.

작은 통에 블루베리를 채워 가는 걸음에도 주었다.

연차를 써서 손발 보태고 떠난다.

서둘렀더니 외려 시간이 넉넉해

둘이 마주앉아 거실에서 아침빛에 30여 분 책을 읽었네.

버스 꽁무니를 보고 올라와

햇발동에 들였던 짐을 사이집으로 옮겼다.

썼던 수건들을 빨고, 먹을거리도 정리하여 내왔다.

 

장맛비가 시작된다 했다.

기숙사 바깥도 한 바퀴 둘러보고, 아침뜨락도 들여다보았다.

맥문동은 자리를 잘 잡아 실하고, 비트가 무럭무럭 자라고,

샤스타데이지는 아직도 꽃을 피워내는 것들이 있다.

흐린 하늘에 원추리 다홍빛이 환하고,

수레국화는 아직 왕성하다.

연어의 날 직전 점주샘과 풀을 뽑아준 ()() 안 낮은 장미들이

이제야 기를 좀 펴고 꽃들을 내밀고 있다.

올해 학교에서 옮겨주었던 참나리는 꽃을 피우진 못했으나 씨를 잔뜩 안았다.

민트 한 무더기는 실하게 세를 넓히는 중.

아가미길의 키 작은 광나무는 거의 말라죽었다 싶었지만

용케 잎을 피우고 꽃까지 단 것들이 제법 적잖다.

올해를 넘겨보고 아주 죽은 것은 빼내고 새로 덧심어야지 한다.

달못 둔덕에 엊그제 심은 잔디가 딱 자리를 잘 잡은 듯 보인다.

꽃그늘길로 내려오며 능소화 뻗은 가지를 기둥에 감아주었다.

전체적으로 비에 큰 피해를 입을 곳은 없겠지 싶다.

아침뜨락을 나오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엊저녁 온 스무 살 청년의 문자를 읽는다.

할머니가 계시기도 하고 삼촌과 고모가 없는 것도 아니나

사실상 가장노릇을 하는 그였다.

올해 대학을 입학하고 주말이면 호숫가 카페에서 일을 하며 제 생활을 꾸렸다.

고단했을 한 학기, 점심 한 번 편히 먹으라고 밥 한 끼 돈을 보냈더랬네.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는 게 쉬운 게 아닌데라는 문장을 보내왔다.

찡했다.

그저 내 처지에서 할 만한 얼마쯤의 작은 마음이었는데, 되려 큰 감동이었다.

좋은 마음으로 하는 작은 일을 뾰족하지 않게 받아주는 그가 고마웠다.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 많을 스물,

여름과 겨울 셔츠 하나는 사주어야지 하는.

나이 열둘에 엄마를 보내고 장애가 있는 동생을 챙기며 청소년기를 보낸 그다.

나라가, 사회가 할 일도 있겠지만, 곁에서 여러 어른들이 또한 그에게 눈길을 주어야.

고맙다, 잘 살아내고 있는 그대여!

 

창대비에 가까워 오늘 야삼경 아침뜨락 걷는 건 거두었는데,

이리 비 쏟아지는데 아무렴 저들도 비를 피하고 있겠지 하고.

멧돼지와 고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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