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22.불날.맑음 / 과일과 곡식, 꽃밭이 만발할 것이요

지난 초가을 큰 스님을 한 분 뵈러 갔는데,
당신의 방에서 잠시 숨이 멎는 듯하였더이다.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루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두 폭짜리 병풍에 쓰인 붓글은
스님의 뜻으로든 글쓴이의 뜻으로든
신동엽의 대서사시 <금강>의 서시가 담겨있었지요.
십수 년도 더 전에 곧잘 외며 다녔던 서시의 1, 2의 첫 연입니다.
그리워지기,
창비에서 전작시로 나왔던 것을 찾아놓고도 답체 들춰보질 못했다가
어제는 아이가 곁에서 더 듣고 싶어 해서 같이 읽어나갔더라지요.
읽지 않았더라도 몇 장쯤은 너무나 생생한 뜨거움으로 기억할 수 있었는데,
해월의 행적도 그 가운데 하나랍니다.
쫓겨다니며도 멍석을 짜고 과수나무를 심고 채소 씨를 뿌리던 그가 아니던가요.
쓰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떠나더라도
이 다음날 누군가가 이곳에 와 쓰고 따먹을 거 아니냐 했지요.
생각해보니 물꼬에서, 특히 계자에서 청소할 적마다
우리를 위해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다음에 이 곳을 쓸 누군가를 위해 빛을 내자는 것도
이 한 장이 영향을 미쳤지 않았을까 싶데요.
그런데 제 기억은 짧았더이다.
그 장은 다음 한 연이 더 있었지요
(물론 그 출전이야 <동경대전>이며들에서 왔을 겝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한다면, 어디 가나 이 지상은
과일과 곡식,
꽃밭이 만발할 것이요
모든 농장은
모든 인류의 것,
모든 천지는 모든 백성의 것
될 게 아닌가.

; <금강> 제 12장 가운데서

다시 가슴이 떨려왔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 대한 온 그리움이 일었다지요.

'역사'는 고대사회가 막을 내리고
서서히 봉건사회로 모습을 드러내며 가을학기를 마쳤습니다
(우리 역사에 봉건 시기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논쟁은 사절).
고대 삼국, 그들은 왜 끊임없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 시기의 문화예술은 일본에 어떻게 넘어갔는가,
불교는 삼국사회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가,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의 통일과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로
우리들의 논쟁이 뜨거웠던 마지막 시간이었지요.

검도와 국화(한국화)를 끝낸 아이들은 산에 갔습니다.
부엽토를 긁으러 들어갔지요.
열다섯 자루를 만들어 굴러 내리며
아래선 큰 성을 만들고 진지도 쌓고 놀았다지요.

입학을 위한 면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꼬가 지난 한 해 입양을 내내 생각하던 한 아이야
사실 이 절차에 놓여있긴 해도 다른 정황이고,
한 가정은 김천에서 15년 유기농을 해 온,
'자립'에 대한 소망에 자극을 많이 준 이들이었더이다.
입학이 어렵게 되더라도
좋은 이웃을 만났다는 사실이 서로에게 기쁨을 주었지요.
넘쳤던 시간에 욕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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