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께 시커먼 입을 벌린 해우소에서가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냄새를 풍긴다.

은행이다.

운동장 가에는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고, 거개 암나무다.

은행알만 해도 많기도 하지.

한때는 그걸 죄 주워 씻고 말리고 나누었다.

이제 딱 노란 컨테이너 두 개에만.

겨울 한 철 아이들과 먹을 만치만. 더하여 조금 나눌 만치만.

봄이 지나면 맛을 잃는 은행이니.

오늘 은행을 줍고 씻고.

 

밤에는 두어 시간 어른 상담.

남편과 딸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해 그가 말한다.

그런데 그 감정은 그대 것이어요.”

얼마나 야속할까! 그들이 내게 상처를 주었는데, 그들이 나쁘지 왜 나란 말인가.

하지만 맞는 말이다.

그들로부터 사과받고 위로받으면 좋겠지만

내 감정에 대한 책임은 내게 있다,

그들이 나를 다치게 했을지라도, 그들이 잘못한 게 분명할지라도.

선생님은 안 당해보셔서 잘 모르세요.”

처음에는 그건 자신의 상황을 내가 잘 몰라 그런 거라고,

다시 긴 하소연이 이어졌다.

하지만 다시 말했다. 내 감정은 내 것이라고.

이론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 감정을 따라 가보면 현실이 된다.

지금 그대에게 중요한 게 무언지 물었다.

딸의 무시와 남편의 무심함, 그때 그대가 뭘 원했는지 자신의 욕구를 보자고.

그리고 지금 그 욕구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같이 찾아보았다.

그들이 움직이지 않아도 내가 나아질 수 있다.

그들이 영영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는 영영 이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가.

내게 상처 입히고 떠난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없다면

우리는 영영 상처를 회복할 수 없는가?

남편과 딸을 이해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 순간 나한테서 일어나는 감정을, 욕구를 보자는,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서 내 상처, 내 아픔, 내게 소중한 것을 보자는.

남편과 딸을 제외하고(물론 가장 좋은 건 상대들의 변화이지만) 나를 보자고.

침묵이 흐르기도 했고, 다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기도 했고,

그러다 그는 자신의 관계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지해주는 관계들,

남편과 딸이 준 상처만 보이던 그가 자신을 지지해준 기억들을.

지금 너무 아프니까 그런 기억들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빛나는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살린다.

그는 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딸과 남편이 아니라.

오늘의 성과였다.

 

살아가며 우린 여러 상처를 입는다.

이상한 사람들도 많고 나쁜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일어난 감정은(나쁜 놈들이 나쁜 놈이 아닌 게 아니라) 내 것이다.

그래서 회복도 내게서 나올 수 있다.

나쁜 놈이 죄값을 받지 않더라도, 내게 사과하지 않더라도.

그 상황에서 내가 원했던 게 무엇인지 찾고

그 욕구를 이해하고 안아주고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치유가 일어난다.

해봐야 안다. 내게 그것이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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