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치과를 다녀온, 치료 후유증 치통이 훑고간 밤이었다.
아침뜨락에는 또 멧돼지 다녀갔다.
밥못 아래 경사지 밑단은 이미 여러 차례 쟁기질하듯 파헤쳐져 있었다.
아침에 보니 거기를 또 파놓았다.
다른 데를 헤치지 않고 그곳만 그리한다면,
그래 계속 그곳을 파라고 부추길 판이다. 고맙다고 할.
그곳에는 심은 것도 없이 그저 물이 껴 물길인 양 난 곳. 수로까지야 아니지만.
헌데 헤친 곳이 조금 더 올라왔다 싶어 보니
역시 잔디까지 뒤집어 놓았다.
그렇더라도, 부디 거기서만 놀고들 가시라.
두더지들이 들쑤셔놓은 곳들도 여러 곳.
솟은 흙들을 발로 꾹 꾸욱 밟아주다.
지난 집중상담에서 심었던 아고라 위쪽 등받이, 그러니까 지느러미길 왼편 쪽 잔디를
발로 잘 밟아주다.
그것도 일이라고 힘이 든다.
한 공간의 이불을 빤다.
청소가 그렇듯 물꼬의 너른 공간은 한 종류의 일을 한 번에 다하기보다
공간 중심으로 일을 한 호흡으로 끝내고는 한다.
어제오늘 무청도 데치다.
바깥 수돗가 노란 천막 안에다가 빨랫줄에 척척 걸치다.
지난해는 시래기를 놓쳐 내내 아쉬웠던 밥상이었다.
덧붙이공사를 한 뒤로 사이집 툇마루를 처음 썼다. 볕이 좋았다.
난방이 따로 되는 곳은 아니었다. 난방기구도 없다.
겨울은 쓸 일 없겠다고 생각했던 공간.
등받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사실 채 한 쪽도 읽지 않고 드는 생각 때문에 다른 일을 하기 일쑤였지만
오랜만에 흙날 오후 볕을 달게 받으며
내 삶에 복지가 상승한 기분이었다.
마치 모든 걸 갖춘 것 같은.
남들이 보면 턱없이 궁한 살림이나 많은 걸 가지고 살았고,
더하는 것보다 복지가 느니 늘 그렇듯 삶의 최고조라.
없이 살면 이런 게 또 좋다. 복되다고 느낄 순간이 흔하니.
물꼬에선 겨울의 따뜻한 수돗물도 그렇다.
물꼬 바깥식구 몇과 소식 주고받다.
상담하는 몇은 낼모레부터 제주도로 가 한달살이를 하기로 했다 하고,
같이 설악산을 갔던 이랑 아이들 이야기를 주고받고,
소정샘도, 유설샘도, 가까이 사는 품앗이샘들도,
집중상담을 했던 아이와 청계를 다녀갔던 아이에게도 안녕을 물었다.
책을 보내주어야 할 일이 있어 한 친구에게 부탁했는데,
바삐 지나며 주소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보내게 했다.
이런! 같은 이름에 같은 직업을 가진 경우가 더러 있지 않나.
상황이 꼬이려면 별일이 다 있지. 책은 엉뚱한 이에게 갔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 까마득히 잊었을까, 그 이름은 내가 ‘아는’ 이름이기도 했다.
학생기 어느 때 같이 학교를 다녔던 우리였다.
각자 걸어온 세월이 30년도 훨씬 넘어 되었다.
서울의 한 지하철역이 가까운 찻집에서 석사를 막 밟기 시작한 그를 만났던 듯도.
그때로부터도 30년은 되었겄다.
91년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기고했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를 두고 얘기를 나누었던가 말았던가.
그러고 보니 우리 나이란 게 제 분야에서 자리를 좀 잡았음직하다.
혹 우리가 서로 알지도 모르겠단 걸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에야 알았다.
그렇지만 굳이 다시 알은 체를 할 만큼 우리 사이에 어떤 동일점이 없었던 듯.
그냥 지금에(몰랐던 대로) 있기로 했다.
그건 한때 친구찾기 학교찾기가 유행이던 시절에 그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태도 같은.
만나서 옛이야기를 곱씹고 또 곱씹는 시간이 결코 건설적이지 않아보였던.
뭐 현재에 사느라고 늘 바빴으므로.
어쩌면 이제 새로 맺는 관계에 대한 피로감을 줄이고픈 늙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관계 맺는 이들에게 더 충실하고픈.
더 찾아보면 정말 동일인인지 알 수도 있겠지만 관두었다.
그 역시 아는 사람이 맞다면 아는 체를 했을 테니까.
앗, 목이 따갑다.
아들이 잠시 나간다고 이 계절에 반바지를 입은 채 집 앞을 다녀와 감기에 들더니
밥상을 같이 하고선 그걸 달고 왔던가 보다.
소금물로 가글하고, 꿀을 듬뿍 머금다 목으로 넘기고, 목도리를 했다.
잠자리에서 마스크도 하고 잤다, 집안 공기도 찬 이곳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