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8.불날. 흐림

조회 수 374 추천 수 0 2022.01.11 02:18:52


 

눈이 지탱을 못하는 요즘이다.

컴퓨터 모니터 앞과 코바늘뜨개실이 놓인 탁자와 책이 놓인 책상 앞,

그리고 몇 차례 섰던 부엌 앞,

오늘의 동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자정이 넘어까지.

마라톤을 하고 무너져 내린 몸처럼 눈이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눈 밝은 그 좋은 시절에는 무얼 했던가.

그래도 아직 시력이 남아있어 또한 귀한.

 

책이 삶을 바꾸지 않지만 책을 읽고 나면 마음의 위치가 0.5정도 살짝 옮겨지는 것 같다,

한 소설가가 그랬다.

나는 삶을 통한 책읽기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지만,

거기에는 일 많은 멧골살이라는 뜻이 있는 대신 게으름이 묻혀 있기도 하다.

읽으려고 쌓아만 두고 손을 대지 못한 책을 보자면,

누군가가 말한 책에 호기심이라도 가면

나날이 사는 일에 책이 멀 때 아쉬움이 크다.

책의 무한한 우주가 주는 매력를 알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이란 게 대개 성장에 대한 욕구가 있기 마련이라,

그런 성장에 책이 주는 영향도 적지 않음을 알기도 하고,

뭐 책을 읽어야겠는 까닭이야 수가 없다.

하지만 책읽기는 내게 밥하기보다 늘 뒤에 있는 삶이라

그래서 밥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은근 못 읽는 심정이 부아가 날 때가 있다.

그런 나를 오늘은 피에르 바야르가 위로하였더라;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비법서? 그건 아니고.

거기 나오는 에피소드 하나;

서아프리카 티브족에게 햄릿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햄릿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당연히 그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든 뭐든 그들은 모른다.

그들은 햄릿에 익숙한 이들과 다른 질문을 던지더란다.

텍스트에 대해 잘 몰라 엉뚱한 질문을 던지지만

티브족의 질문은 더 많은 질문과 토론을 부르고 텍스트에 대한 고찰을 이끌어내,

설혹 애초 <햄릿>이 씌어진 의미는 숨어버렸을 지라도 책에 대한 해석은 풍요로워졌다.

역설적이게도 그 책을 읽었더라면 오히려 몰랐을 어떤 것을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티브족을 이해하게도 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는 것,

책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그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라는 것.

읽었든 훑었든 귀동냥했든 읽다 말았든 전혀 읽지 않았든

그것에 대해 제 생각을 말하고 의견을 나누라고 그가 말했다.

 

어제 3차 접종을 하고 돌아온 학교아저씨는

배가 몹시 당겨서 엉거주춤 걷게 된다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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