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까지 나는 정말로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이탁오가 ‘성인의 가르침에서 쓴 구절이다.
장정일은 이 글을 보고 핑, 눈물이 돌았다 했다.
그것을 재인용하며 이현우는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새삼 ‘호모쿵푸스’로 진화하는 수밖에. 마흔이 넘었더라도 말이다.
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읽으며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는 거라는,
어떤 것에 대해 제 생각을 말하고 의견을 나누는 거라든.
나는 내 말을 하겠다.
이탁오는 유학자들의 행태에 넌더리를 치며 말했더랬다.
p.143
“겉으로는 도학을 합네 하며 속으로는 부귀를 추구하고, 학문이 깊은 척하고 우아한 복장을 하였으되,
하는 행실은 개돼지와 다를 바 없다.”
(<이탁오 평전>)
나는 내 삶을 살겠다.
내 품격을 내 식으로 지키겠다.
새해라서 그렇겠지, 결심하는 일이 잦을세, 하하.
알베르코 망구엘의 <독서일기>를 읽었다.
1년 동안 달마다 1권 다시 읽기를 했다고.
그의 말에 따르면 개인적 일기와 일반적인 책의 중간쯤 되는 뭔가를 쓰게 되었다고.
책 목록을 여러 분야를 아울러서 균형을 맞췄다는 부분은
같은 류의 책을 쓰게 된 저자로서 들을 만 하였네.
자신을 둘러싼 것들, 움직임과 책이 뒤섞이고 있었다.
알려진 독서가의 명성대로(그 첫째라면 그가 도서관에서 일할 때 노년의 보르헤스에게 4년인가 책을 읽어주었다는 거였다)
온각 책을 다 불러오는.
사유는 깊을지 몰라도 재미는 별, 감흥도 별, 지나치게 사변적이었다.
또 다른 이는 또 다르게 읽겠지.
나는 어떻게 쓸 것인가!(2월 말에 마감할 초고)
식구 하나 감기를 데려왔다.
앗! 계자를 앞두고 있는 나로서는 긴장이.
하여 식구들과 자가격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