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하여라!

이른 아침 마을 산책을 나갔다가 오색의 한 노모 반갑게 만났네.

손을 맞잡으시며 댁에 들어가자셨다.

얼굴이 왜 그리 축이 나셨나 듣게 되다.

본가 말고 아랫마을에 펜션을 하나 지어 독채로 빌려주시는데,

거기 청소를 하러 가셨더라지.

베란다 문이 닫히면 밖에서는 열 수 없는 구조.

당연히 문을 열어놓고 창을 닦다 아, 그만 문이 밀려 닫혀버렸네.

그런데 문밖이란 게 계곡, 요새는 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혼자 온갖 용을 다 쓰다 이제 죽는구나 싶었을 때,

거의 닫혀있다시피 한 이웃 펜션에서

그 댁 장성한 아들이 화분에 물을 주러 왔다가 이 노모를 발견,

그렇게 구조되셨네.

엊그제 일이었다고.

하얗게 질려서 한밤에 응급실도 다녀오시고.

혼자 사는 노모에게 아침저녁 전화 넣어야 하는 까닭이라.

상추와 쑥갓을 뜯어 나눠주셔서 한아름 안고 돌아오다.

머무는 댁에선 아예 주인네 밥상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는.

마을에 찾아든 객이 아니라 스미고 있달까.

하기야 벌써 설악행 프로젝트 4차 걸음이 아닌가.

 

설악산에 올 때마다 베이스캠프로 삼고자 하는 공간을 지난 여정에서 발견하였고,

오늘 배낭 메고 들어가다.

비박하는 선배들이 그러더만. 아주 잔뜩 몇 날 며칠 머물겠듯 보이는 배낭을 메고

불과 몇 백 미터 들어가지 않고 진을 치더니만 딱 그 짝 같은 배낭.

삽도 들었고 낫도 든.

풀을 베며 가리라 했더니 오랜 가뭄에 그럴 일은 없었다.

밭이라기에 숲이 된, 그늘 좋은 곳에 텐트를 치고 나절가웃을 보냈네.

사람 살면 물이 중하지,

빈집이나 사람 살았던 곳이니 물이야 있을 테지,

오색 어른들도 그 집 뒤란에 샘이 있다 증언했던.

찾아 나섰네.

골을 타고 내려오는 물이 모이는 곳이 있었고,

낙엽 들추니 바로 그곳이었던.

사람 떠난 곳을 도룡뇽이 제 집 삼았더라.

화장실 자리는 정해놓으면 좋겠지.

빈집이지만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등기가 되어 있지 않다지만 그렇다고 무단침입을 할 수는 없는.

열려있는 화장실이라 할지라도.

나무들이 채운 밭 가장자리 삽질하여 해우소 공간 만들어두다.

밥도 끓여 먹고 책도 보고 텐트 안에서 낮잠도 자다.

 

밤비 내렸다. 시원하게 내렸다.

우리가 초래한 기후위기를 피부로 느끼게 하는 가뭄 오래,

하늘은 또 잠시 우리를 살려주고.

한밤에는 마을 사람을 비롯 또래들이 모였다.

마을 형님 하나는 읍내 장을 다녀오며

필요한 것 없냐 물어봐 주시기도 했더랬네.

내 즐기는 크로와상을 사다주시기까지.

무슨 만담꾼의 공연을 보듯 즐거움을 아는 이들 사이 오가는 대화가 얼마나 단지

가는 밤이 아쉬웠네.

그렇게 설악사람이 되어간다.

 

학교에서는 고래방 뒤란, 우물가 예취기가 돌아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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