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렸다. 기다렸는데. 한참 되었는데.

오지 않았다. 계속 기다렸는데.

마침내 해날부터 비가 내렸다, 제법. 줄기차게 내린 건 아니지만.

산이 물을 머금을 만했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골로 모이는 물이 아침뜨락의 밥못으로 스밀 것이다.

그러면 못의 수위가 올라가고,

넉넉해진 물이 못을 더욱 맑힐 것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밥못에 갔다. 하지만 수위는 그대로였다.

그나마 한창 넓혀지는 가래 잎들이 물을 정화시키고 있었다.

가래 잎들이 윤기 넘친 푸른 색이었다. 그 사이로 네가래가 크고 있었고,

더러 노랑어리연꽃 잎들이 한 자리 채웠다. 어리연꽃은 진작에 졌겠지. 못다 폈을 수도.

잎이 싱그러웠다.

지하수를 끌어올린 호스 밸브를 열었다,

물을 채워 수온을 낮춰주어 버들치들 편히 노니라고.

 

아침뜨락에 멧돼지 다녀가다.

한동안 조용했더랬다.

지느러미길부터 발자국이 보인다.

돌계단을 올라 벽돌길을 막 들어서는데,

왼편으로 몇, 더 걸으니 옴자의 눈썹달 지대에도 대여섯 파헤쳤네.

대나무 수로를 놓은, 겹겹이 댐처럼 쌓은 돌들을 뒤집어놓고,

뽕나무 휘돌아가는 곳 가지런히 쌓은 돌들도 다 흩뜨려 놓았다.

화도 안 난다. 그러려니.

그렇다고 전기울타리를 놓고 감전사를 시킬 수는 없는.

그는 그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사는 중.

아가미길에도 두어 곳 뒤집어 놓았고,

밥못 아래 물기 많은 끝은 아주 밭갈이를 해놓았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지렁이며들을 찾았을 테지, 여기 그것들 만큼은 많으니까.

올해는 멧돼지들과 어떻게 싸워낸다지...?

 

아침뜨락에서 일하다.

오전에는 아가미길의 키 낮은 광나무 가지들을 손봤다.

다 죽어버린 줄 알았던, 그래서 다시 심어야지 하던,

그렇게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던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던.

새 혀처럼 뒤늦게 마른 가지 사이로 봄처럼 내밀던 잎들.

풀을 뽑고, 얼어죽은 혹은 말라죽은 가지들을 잘랐다.

잊지 않고 끝까지 어떻게든 안고 있으면 생명의 씨앗은 그렇게 피어오른다.

저버리지 않는 약속처럼 그렇게 일어나 세상을 연다.

나오면서 꽃그늘길 가장자리의 풀들을 낫으로 쳐내주고,

원추리 사이 키 큰 쑥과 개망초들을 뽑아주다.

 

오후에는 햇발동 곁 석축 앞에, 그러니까 측백을 심은 이름자들 새긴 돌판 곁에

나무 원기둥 하나 세웠다.

구덩이를 파고 몰타르를 넣고 수평을 맞추고.

그 위에 솔라 문주등 하나 달 거라.

햇발동 앞 또글또글 바닥을 밝힌 작은 솔라등이 없지 않으나

칠흑같이 어둔 밤 꺾여서 들어오는 그 께가 어둑해서

비 내린 날 어쩌다 물이 고인 곳을 밟게 되기도.

거기 조금 더 밝힌다면 겨울에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도 가벼울, 따술.

 

이웃 밭 경계에서 풀을 좀 벴는데,

조심하고 하여도 꼭 찔리고는 한다.

대추나무 때문인데,

이웃 나무에서 떨어진 대추들이 우리 땅에서 자란다, 마구 마구 자란다.

애써 키우는 것들은 그야말로 애를 써야 하고

풀이 그렇듯 이렇게 원치 않는 것은 저절로 잘도 자란다.

풀과 섞여 있을 것을 예상하고 낫질을 해도,

쳐다보며 낫질을 할 때조차도 한 번은 찔리는.

아직 어리고 부드러우나 거기라고 가시가 없는 게 아닌.

작아서 오히려 더 경계해야 하는.

가시가 크면 아프긴 해도 빼기 쉬운데,

이건 한참을 애먹인다. 바늘로 빼지면 다행하지만

밤을 지나고 다음날까지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다

쪼끄맣게 까만 점처럼, 점이라기보다 아주 작은 티끌 하나 묻은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울타리를 넘어오는 가지들이 만드는 불편이 대추나무만도 아니다.

잘아서 따지도 않는, 영양가 없는 오디가 마당으로 깔려 벌레처럼 새까맣고,

고욤나무 가지 그늘로 붓꽃들이 맥을 추지 못하고...

여러 해를 그리 보냈는데, 이웃에 말을 넣고 잘라야 할 모양이다.

 

해거름에는 아침뜨락의 꽃그늘길로 들어갔다.

오늘은 줄장미와 능소화 가지들을 정리해서 잘 묶어야겠다.

남쪽 편부터.

아래쪽 꽃들을 따주고, 가지들이 엉키지 않게 또 제 길을 잘 만들도록 엮었다.

아래 풀들도 정리를 좀.

북쪽 편으로도 장미와 다래 덩굴들이 오를 길을 만들어주다.

 

옴자에서 걸어 나와 여기저기 툭툭 핀 샤스타 데이지들도 뽑거나 낫으로 잘라내고,

여기저기 키 큰 풀들 베고,

무한대 구역의 민트들을 살리느라 풀들 뽑아주고

(올해는 가물어 겨우겨우 자라고 있는 민트들),

바위 둘레 수크령 마른풀을 이제야 정리해주고,

또 다른 바위 둘레에 자리 잡은 꽃범의 꼬리들을 돌보다.

올해 유달리 기세 좋은, 에워싼 토끼풀들도 다 쳐내주고.

 

, 그리고 키 큰 광나무 네 그루 가운데 2번을, 가지를 아주 치다.

아이구, 가슴이야 하며.

사람까지 들여 심었던 것들.

자리 잡는가 했더니 겨울가뭄을 이기지 못하고 말라가고 있었다.

아주 죽은 건 아니고.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믿어본다.

옴자의 세 그루 단풍 가운데 한 그루도 결국 잘랐다. 죽었다.

그 자리에 창고동 앞 꽃밭에 있는 단풍을 옮길까...

산에서 뽑아와 심어둔 지 여러 해 흐른 것.

 

오는 이들에겐 이 모든 역사가 결과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노니.

그러므로 허망할 것 없으리니.

그 길에서 아이들이 혹은 어른들이 웃으며 걸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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