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30.쇠날.맑음 / 우리들의 어머니

조회 수 1256 추천 수 0 2006.01.02 12:32:00

2005.12.30.쇠날.맑음 / 우리들의 어머니

야삼경을 어머니랑 이야기로 지새운 시골 밤이었습니다.
전쟁 때 미군들에게 집을 내주고 소개(疏開)나가서
당신 어머니(할머니)랑 밥을 빌어 다섯 동생을 거둬 멕인 시절이며
마흔도 안돼 세상을 등진 당신 남편에 대해서도 오랜만에 입을 여셨지요.
그래놓고도 새벽부터 짐을 꾸려주십니다.
"(약재를 갖가지 넣었으니) 어느 것이든 들어맞는 게 있겄지."
약재를 캐러 다니는 노인네들한테서 사들인, 관절에 좋다는 약은 다 든 탕약입니다.
"니들은 설탕 같은 거 안 쓰니까..."
이틀 밤낮을 잠 쫓으며 고은 조청이 든 고추장.
"새벽시장을 두 번이나 가 경매에서..."
잘 먹는다고 명태를 사다 꾸덕꾸덕 말려 놓았던 거네요.
"어제 창원 큰 시장에 가니까 이게 나왔더라.
눈이 번쩍 뜨여서 다 샀다. 충무통영에서 올라온 거라데."
딸이 잘 먹는, 고추장에 무쳐낸 풋마늘입니다.
"이건 꼬도밥(꼬들하게 찐 밥)인데..."
별미라며 주먹밥 만들어 온 식구 나눠먹으랍니다.
"이걸 잘 먹는 갑네?"
아이 가진 식구가 좋아한다했더니 새벽 밭에 나가 시금치도 무쳐주십니다,
쪼끔 밖에 없어서 우짜냐시며.
"거는 산중이라 이런 거 귀하제?"
윤기 나는, 맛나기도 맛난 돌김도 들어갑니다.
"차가 없어서..."
기차타고 갈 걸음이라 충분히 챙길 수가 없노라시며도
손수 담으신 젓갈이며 바리바리 챙기시지요.
바깥일에서 손떼신 지 몇 해,
빤한 살림에서 지난 번 건축비용마련에 어찌 돈을 보탰냐 여쭈었지요.
"니 복이다."
이러저러 돈이 생기게 된 사연을 전하시며
여식을 줄 수 있게 된 것도 당신 복이 아니라 자식 복이랍디다.
이 어머니가 어찌 제 무식한 어머니기만 하겠는지요.
우리들의 어머니...

돌아온 기락샘과 하다랑 학교에 있던 온 식구들이
마당 한켠에서 불을 피웠답니다.
새우도 굽고 삼겹살도 구웠다지요.
아무리 좋은 뜻인들 그걸 구현하려는 이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일지요.
식구들이 평화롭고 행복하여 좋은 요즘입니다.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로 바로 서울 왔습니다.
호암아트홀에서 <퀸테센스 색소폰 퀸텟> 공연이 있었지요.
5개의 색소폰과 50개의 손가락으로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헨델 같은 거장들의 음악을
새롭게 편곡하여 연주하는 이들입니다.
어느 선배 셋이 초대해준 자리였더이다.
색소폰으로 말하기와 듣기가 되는 그 연주자들이 경이로웠고,
의사의 길을 가면서도 인문을 가벼이 보지 않는,
자신들이 현악 연주자이기도 한 셋 선배도 다시 쳐다보게 되데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 있는 어느 이는
송년선물로 국악 CD를 세장이나 내미셨습니다.
늦은 밤엔 또 다른 선배 댁에서 송년모임이 있었지요.
중앙일보 편집기자이면서 꾸준한 옛공부를 통한 글쓰기를 줄기차게 해온,
올 한 해만도 선이 굵은 책을 두 권이나 내민 저력의 인물이랍니다.
책을 챙겨주시데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가를 생각한 시간들이었지요.
'인문'은 얼마나 중요한 바탕인지요...
그리고 다음 모임,
집짓기의 마지막 재정을 가뿐히 정리할 수 있게 도와준
선배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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