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고도 간다고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코로나19의 세 해 말이다.

이웃 도시에 논두렁 어르신 부부가 계신다.

올해 나오는 책을 들고 가리라던 걸음인데

겨우 해를 넘기지 않고 나올 책이라,

하여 연락 닿았을 때 인사를 가자고 오늘 기술교육 가기 전 넉넉하게 시간을 냈다.

멧골에서 드릴 게 무에 있나,

마침 선배 하나가 보내온 보이차 떡차가 있어

하나는 여기서 먹고 다른 하나를 쌌다.

더하여 우리 수확한 호두 얼마쯤도.

 

대만홍차인 동방미인처럼 만들었다는 귀비차를 달여 내셨다.

차를 다루는 댁이라 그곳에선 알려진 귀한 차들 아니어도 맛나다.

역시나 만족스런 차였다. 날 차고 비 내리면 맛을 더한다지만 그보다 훨씬 맛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귀한 이라고

열쇠가 달린 장에서 보이차도 하나 꺼내 맛을 봬주셨다.

삼향이 났다. 오래 발효시킨 보이차들이 갖는 특징 하나.

 

가까운 곳에 제법 이름값을 하는 김밥집이 있었다.

거기서 김밥을 사와 다식겸 낮밥겸 먹었다.

무슨 호일을 이리 많이 썼대?”

두 줄은 일회용 도시락에 들었고, 나머지 두 줄은 각각 호일이 싸였다.

다 먹고 호일을 접었다.

이거 버리실 거지요?”

가져와서 군고구마 할 때 써야지 하고 챙겼다.

물꼬는 뭐라고 애껴 쓰지...”

어디서나 그리 챙기지는 않는다. 1부터 100까지 그리 살뜰히 살지도 않고.

물꼬도 여러 차례 오셨고,

차를 나눈 십년 동안 주에 한 차례씩 만나는 날 많았던 만큼 서로의 삶을 퍽 안다.

그래서 그리 자연스레 챙길 수 있었을 게다.

그럴 수 있는 관계가 고마웠다.

다른 곳에선 혹 지나치게 부산을 떠는 모습으로 보일까 주저했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과 사람들이 고마운!

오늘도 삶이 고마웠네.

 

돌아오는 내게 따지 않은 귀비차를 선물하셨다.

늘 드리는 것보다 받는 게 많다.

 

며칠씩 밤에 온몸에 가려움증이 일어날 때가 있다.

아들이 아토피 연고를 보낸다고 연락이 왔다.

닥친 의사 국가고시에만도 정신이 없을 텐데

그리 챙겨주어서 고마웠다.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살더니

그 아이 커서는 부모를 살피는 그 사랑으로 또한 산다.

받는 게 더 많은 우리 인생이다.

사는 일이 또 고맙다.

 

부러진 괭이자루를 바꾸고,

아침뜨락의 밥못에 들어가는 물의 농수관 끝머리가 터져 사왔고,

못에서 빠져나가는 농수관에 메인밸브를 달아야겠다 싶어 역시 사서 들어왔다.

나간 걸음에 더 멀리까지 가서 겨울 꽃을 몇 들여오기도.

무를 수확했다.

따뜻한 늦가을이어 작다 싶었던 무가 마지막까지 몸을 키웠다.

사는 일이 또한 고맙다.

 

두 시간이나 이어진 한밤의 통화가 있었다.

상담이라기보다 수다랄까.

아무에게도 못했던 지난 20년의 부부 사이에 맺혔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안전한 이곳이어 고마웠다.

여기여서 사는 일이 더욱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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