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8.달날. 흐리다 오후 비

조회 수 300 추천 수 0 2022.12.24 00:31:11


쉬엄쉬엄 건너가는 하루라, 가벼운 김장이었으나 그래도 김장한 끝이라고.

그래도 아침을 열기는 수행부터! 겨울90일수행 기간이라.

나와 있던 큰 살림도구들 씻고 말리고,

배추를 절였던 현장인 바깥수돗가를 청소하고.

쉬면서 수를 놓고, 책과 영화와 함께하다.

 

밑줄 긋기. <이끼와 함께>(로빈 월 키머러 / 눌와).

22천여 종에 달하는 이끼는 종마다 개성도 각양각색.

이끼는 크기가 큰 식물들이 살 수 없는 공간을 차지한다. 이끼의 존재 방식은 작은 몸집을 축복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신의 독특한

구조를 공기와 지면 사이에 작용하는 물리법칙에 맞춤으로써 번성한다. 작기 때문에 한계는 강점이 된다. 누가 내 조카에게도 이를 

알려줬으면 좋겠다.’

이끼는 작다.

꽃과 열매가 없고, 줄기와 뿌리가 단순하다.

덕분에 다른 식물이 살지 못하는 곳에 먼저 자리를 잡아

다른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끼는 뿌리와 관다발 조직이 없어 높이 자랄 수 없지만,

표면에 납작 붙어 아주 작은 습기만 있어도 살아간다.

큰 식물들이 수분을 잃지 않으려 줄기에 물을 저장하고 껍질을 발달시킬 때

이끼는 물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잎을 말고 기다리며,

물이 있으면 물의 특성을 이용해 큰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쑥쑥 자란다.

작고 단순한 강점을 삼아 곳곳에서 그렇게 번성한다.

 

이끼도 숲을 이룬다.

무성하게 자란 이끼는 독특한 미니어처 생태계를 이루어 수많은 생명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이끼는 작은 곤충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그 곤충들은 이끼의 정자를 옮겨 번식을 돕는 식으로 공생관계를 이룬다.

숲의 나무 밑동에서 자란 이끼는 수분을 머금어 어린 나무가 자랄 환경을 제공하고,

거대한 나무가 생을 다해 쓰러지면, 그곳에서 또다시 이끼가 자라난다.

누가 내 조카에게도 이를 알려줬으면 좋겠다, 이런 문장이 참 좋다.

 

네삭치이끼는 단기적 이익을 위해서는 무성아를 생성하고 장기적 우위를 위해서는 포자를 생성하는 두 가지 전략으로 도박을 한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서식지에서 자연선택은 하나의 번식 선택에 집중하는 개체보다는 유연성을 발휘하는 개체를 선호한다. 역설적이게도

고유한 생활 방식에 적응한 종들은 어느새 사라지지만 네삭치이끼는 주어진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선택의 자유를 유지함으로써 

살아남는다.’

 

재능에는 서로 배려해야 할 책임이 뒤따른다. 부족 노인들이 말하는 이 같은 호혜의 연결망은 우리 모두를 연결한다. 이러한 

탄생의 이야기가 내 과학 연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태학적 공동체를 연구하며 항상 호혜를 발견한다. (…) 

이끼의 역할은 바위에 옷을 입히고, 물을 정화하고, 새가 사는 둥지를 푹신하게 하는 것이다. 아주 명료하다. 그렇다면 이끼가 

인간에게 베푸는 재능은 무엇일까?’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은 이끼를 생리대와 기저귀로 쓰기도 했다지.

그러한 생존 조건들이 조화를 이루는 건 거의 불가능하므로 빛이끼는 금보다 훨씬 귀하다. 서풍이 계속해서 호숫가에 부딪혔기 

때문에 빛이끼가 살 동굴이 만들어졌다. 빛이끼와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건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장소로 우리를 데려온 수많은 우연이 

동시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 선물에 보답하는 적절한 화답은 반짝이는 것뿐이다.’

 

삶에 대한 지혜가 어디나 있듯 이끼의 세계도 그러하다.

그 세계는 언제나 들여다보는 이가 갖는 우주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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