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밥상으로 같이 부르고 싶은 어른이 있었다.
한동안 안댁이 도시로 나가 있어 얼마동안 혼자 드신다는데,
한두 끼쯤 낼 수도 있으련 말았다.
일이 바쁠 적 들에서 돌아와 밥 차리기 힘들겠다고
우리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 먹자고 부부랑 같이 몇 차례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좋아하신다는 떡국 한 끼 내지 못했다.
어려운 음식도 아니고, 반찬 가짓수가 여럿이어야 하는 음식도 아닌데.
순전히 추위 때문이었다.
그 댁은 들어서면 잠깐 앉았어도 점퍼를 벗어야만 할 만치 훈기있는 집인데,
학교는, 가마솥방은 너무 추워 오십사 못했다.
물꼬는, 겨울이 몹시 깊고 길다...
먼 도시를 다녀오다.
설에 뵙지 못한 집안사람들 보다.
어르신들이 하는 이야기는
들었을 법한데 잊혀 처음처럼 들리기도 하고
들었으나 처음처럼 듣기도 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거의 없다.
집안사람들이 불려나오고, 그 사이 그들에게 있는 한두 가지 변화 정도가 새롭다면 새로운.
용돈을 챙겨드려야 하는 부담이 없는 넉넉한 어른들은, 고백하자면, 고맙다.
하여 얼굴만 보여도 되는 것을, 그 시간이 쉽지 않다.
죽을 날만 기다린다, 는 말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리 슬픈 무게를 단 말이 아니었으나
곱씹을 때 그 문장은 무게감이 좀 있다.
끝 날까지 살아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따라 온다.
이 말은 당신들이 안 됐다거나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다만 나의 생존을 말함이라.
아이의 막내고모가 옷가지를 좀 가져가라 했다.
옷 사는 걸 즐기고, 예쁘게 잘 입는 사람이다.
옷이란 게 저마다 취향이 있는지라
아무리 예쁜 옷이라도 제 옷으로 입기는 또 쉽지 않다.
멧골에 주로 사는 사람이 외출복이 그리 필요치도 않고,
일상복이라 하더라도 흙바닥에 질질 끌리는 옷이라면 소용에 닿지도 않고.
“옷 많아요. 하지만 한 번 봅시다.”
눈썰미가 좋은 그는 내가 입을 만한 것들로 이미 잘 골라놓았다.
“이런! 보자고 안 했으면 아쉬울 뻔했네!
앞으로 옷을 계속 사 입으시는 걸로!”
“그러면 때때마다 오셔서 챙겨 가시는 걸로!”
지난 30년 옷을 산 적이 거의 없다고 하지만,
그래서 제법 생태적 삶을 사는 것처럼 말하지만,
누군가 산 것을, 사 준 것을 입었다.
나 역시 자신이 입는 옷으로 기후위기를 보태지 않는다 말 못할.
어떤 죄 혹은 어떤 사건에 나는 가해자가 아닌 양 하는 순간이 얼마나 자주인지.
붉어지는 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