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청산장 곁에서 묵었다.

소청 들마루에서 내려다보니 아래 봉정암을 끼고 왼편으로 용아장성이 이어졌고,

오른편으로 공룡능선이 흐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공룡너머로는 속초와 바다가 이어질.

소청산장은 예약을 받지 않는다.

서류절차에 문제가 좀 생겨 개방이 늦어진다는.

대피소 취사실에서 아침을 끓여먹고 천천히 나서다.

하룻밤 사이 봄이 와 있었다.

소청에서 나와 눈을 인 가지들 사이를 지나오니

발목은 여전히 눈에 잠겼으나 봄날이었다.

아이젠을 머잖아 벗었다.

 

봉정암에서 적멸보궁을 지나칠 수 없었다.

스님이 예불 중이었다.

같이 절하고 고개 드니

법당 창으로 바위가 와락 안겨왔다.

몇 손가락에 꼽히는 법당이지요!”

한 불자가 들어서며 말했다.

봉정암 사리탑 등지고 너럭바위 올라

용아장성과 공룡능선, 저 너머 속초 시내까지 보는 풍경은

내설악 최고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수렴동대피소에서 어제 오를 때처럼 다시 낮밥.

곁에 계신 두 분이 순무김치를 나눠주셨다.

인천에서 오신 전직 미술교사와 현직 국어교사.

한 학교에서 근무했던 인연으로,

설악산을 아이들과 함께 탔던 시절을 나누고 계셨다.

대피소에 예약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말 그대로 대피소는 산에서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대피하라는 곳인데

그곳을 관광지처럼 예약을 하는 게 맞느냐,

그러니 자꾸 구석으로 구석으로들 숨어들어가 비박을 하지 않느냐,

좀 더 넓게 야영지를 개방해야 한다는 주장.

으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일도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어제 눈에 덮였던 길이 제법 모습을 드러내고,

왼편으로 흐르는 계곡 가장자리가 퍽 풀려있었다.

하루 사이 다른 계절인 양.

줄줄이 올라오는 이들을 마주하며 내려온다.

어디서 왔냐 물었고, 직업을 묻거나 관계를 물어보기도.

마치 파티에 함께 참석한, 혹은 같은 집을 방문한 같은 손님으로서.

기꺼이 대답하는 사람들.

양구에 근무한다는 군인도 있었다.

! 백두산부대, 8203부대, 4!”

“어, 예, 맞습니다!”

엊그제 지나쳤던 양구였더랬다.

흐린 날 엽서를 찾아보던 양구의 국토정중앙면 우체국.

가볍게 산책처럼 가까이 오르는 이도 있었고,

중무장을 하고 밤을 나려 들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네 싶더니

한 아웃도어회사에서 주관한 한국의 100대명산 오르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이 많다고.

유행의 나라 대한민국.

정작 산 아래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을 볼 때보다

산에서 몇 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때 외려 사람들이 다양하구나 싶다.

그건 아마도 좀 더 가까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인 듯.

우리가 도시의 대로변에서 사람을 붙들고 어디서 왔냐, 어디로 가냐 묻지는 않으니까.

 

동행했던 논두렁 훈샘이 먼저 오색으로 돌아가고,

백담주차장 건너편에서 유일하게 열려있는 식당에서 혼자 하산주를 한 잔 했다.

주차장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쉬며 쉬며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모든 산오름의 마지막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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