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동체인가(2006. 5)

조회 수 4900 추천 수 0 2007.07.20 19:53:00
< 왜 공동체인가 >

옥 영 경


전 세계에 퍼져있는 공동체로 불리는 집단들이 가진 다양한 내용과 형식에도 그 무리들의 공통적인 목표를 ‘땅에 뿌리를 두고 소박하게 어깨 겯고 조화롭게 살아감’이라 할 때 고개를 가로젓는 공동체는 몇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에는 공동체라는 말이 낯선 이들조차 심정적으로 공동체를 받아들이기에 그리 거북해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귀농을 꿈꾸는 이라면 자신 역시 삶의 방향성이 크게 다르지 않는다 생각하고 대열에 합류할 길을 모색도 해보지 않을 지요.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살건 공동체를 꿈꾸건 왜 공동체적 삶을 꿈꾸게 되었나를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 속에서도 역시 공통적인 것들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지금부터 이 글에서 얘기하려는 것 또한 그 대답과 별반 다를 것도 없겠습니다.

전지구적으로 엄청나게 발달한 생산력에도 왜 여전히 사람들은 생계를 걱정하는가;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존재와 존재가 할 짓이 이렇게 경쟁뿐인가; 한 문제를 놓고 인디언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같이 해결하던 공부법처럼 그렇게 살아갈 순 없는 것일까요?
그토록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며 번 돈으로서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얻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지리도 가난하기 이를 데 없으나 생이 충만한 저 산간 오두막살이 할머니는 ‘번 돈이 없어’ 필요한 걸 ‘사지’ 못하니 죽는 길밖에 없단 말인가요?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면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만이 우리를 인간다운 삶으로 끌어갈 수 있는가; 나고 자라는 생명의 길이 어떻게 다른 것의 죽임을 딛고 그것을 통해 견지돼 왔더란 말인가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왜 무엇을 위해서 왔는가를 우리는 깨치며 살고 있는가; 우리 존재가 이 지구 위로 와서 어떤 소명을 부여받았고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깊이 바라보는 시간이 진정 우리에게 얼마나 있었더이까.
단순하고 아름답게 어울려 살 길이 정녕 없는 걸까요? 살아 숨쉬는 생명들이 갖는 경이 속에서 나날을 살 수는 없단 말입니까?

지난 수세기 동안 서구문화가 주도하는 일직선적인 진보관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문명의 패권주의 아래서 세계의 다양한 토착문화들이 소멸을 강요당했다는 거야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이제 이론 축에도 끼지 못하는, 평이한 문장입니다. 이뉴잇[흔히 에스키모라 부르지만 이 말은 ‘날고기를 먹는 인간’이라는 서구식 눈으로 만들어진 낱말이기에 피하려 합니다. 그들 스스로는 Innuit(인간)이라 부르고 있지요.]들이 눈(snow)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오십여 가지의 낱말이 이제 불과 몇 가지 남아있지 않다는 것도 꼭 언어영역의 의미라고만 볼 수 없겠지요. 이같이 토착인의 말이 사라진 것처럼 그 말이 공유하던 지혜와 기술도 사라지고 지속가능했던 여러 삶의 방식 또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인류사회의 내일까지도 크게 걱정스럽게 하고 있지요(최근에 제가 갖는 큰 위기의식 하나는 우리 세대의 어르신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들이 가진 삶의 기술 또한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어른들을 끌어와 우리 아이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는 것도 그 같은 까닭에서지요.). 서구식 산업주의적 개발이라는 것이 특권적인 소수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하여 대다수의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구조적으로 착취하는 매커니즘이라는 것 역시 현대사를 통해 명백히 입증해 왔습니다. 굳이 이런 사회과학적 어투가 아니더라도 우리 시대가 고스란히 한 경험으로도 모르는 얘기가 아니지요.
그래서 일찍이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라다크(<오래된 미래>)를 통해 탈중심화와 적정기술이라는 구체적 아이디어로 제시되는 ‘반개발'이 사회발전의 대안이라 하였습니다. 탈중심화, 그리고 지역의 구체적인 조건과 필요에 기초를 둔 알맞은 삶의 기술을 개발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삶(죽음과 극명하게 대립하는)의 길이라는데 누가 무어라 할 것입니까. 그래서 공동체(특히 지역공동체)라는데 말입니다!
이쯤 되면 공동체는 이리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 위에서의 우리 삶이 거대하게 한 가지 모습으로 중심화 되어가는 것에 반해 작고 여린 것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길!

그런데 이 우주에 공동체 아닌 것이 어디 있던가요. 이 세상 어떤 것이 저 홀로 존재하더란 말입니까. 속세의 인연을 끊고 절집에 들어앉은 스님조차 어디 바깥세상과 무관하던가요. 불교의 연기관이 그런 게 아니더이까. 우리 몸뚱아리 하나만 보더라도 각 부분들의 섬김과 나눔이 있지 않으면 어찌 한 순간인들 살아 숨쉴 수 있을 지요. 세상 만물이 다 어떤 다른 것의 섬김과 헌신 없이는 한 순간도 지속해 나갈 수 없는 그런 존재 아니던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오늘날의 문명이 이런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게 했다는 사실이지요. 그런 깨달음에 대한 무지, 공동체성에 대한 무지가 이 세상의 위기를 가져오고 사람살이를 불행으로 내몰고 행복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특별한 어떤 의미로 공동체를 부르짖는 게 아닙니다. 없는 걸 하자고 하는 것은 더욱 아니지요. 우리 존재가 공동체로 살아 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살았던 것이니까요. 원래 하던 걸 하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공동체는 이렇게 발전된 정의를 가질 수 있겠지요. “지구 위에서의 우리 삶이 거대하게 한 가지 모습으로 중심화 되어가는 것에 반해 작고 여린 것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찾기 위해서 우리 안에 이미 있었던 것을 깨닫고 그것을 회복해내는 것!”
그렇다고 우리끼리 모여 우리끼리만 잘 살자는 게 아닙니다. 깨달은 자들이 모여 살면서 공동체성을 회복해내고 그 실험이 옳다면 들불처럼 번져가 언젠가는 ‘인연을 맞아서’ 온 세상을 정토, 혹은 천국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 지요(우리 아이들이 맞는 세상은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오늘도 공동체의 힘겨운 걸음을 옮기는 이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아름다운 길을 걷는 숱한 공동체들이 왜 갈라지거나 깨져서 사라지고 마는 걸까요? 공동체에 발을 담궜던 너무나 착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왜 다시 보지 못할 만치 상처를 입고 헤어지고 마는 것일까요? 목말라하던 참생명으로 가는 길인 줄 알면서도 시작하려니 발목을 잡는 현실이 너무 질겨서 엄두도 못 내다가 어느 날 공동체를 방문하여 그곳 사람들과 술 한 잔 마시며(뭐, 차라도) 어불려 얘기하다보니 마음이 그만 다 통하고 그토록 멀었던 공동체 삶이 시원한 대로처럼 잘 될 것 같아 용기를 얻어서 시작했을 겝니다. 어디 무슨 대단한 소명의식만이 공동체에 발을 들이게 했을까요. 자신이 여태 누려왔던 편리(모든 기득권)도 과감히 박차고 그저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자고 시작한 공동체였는데, 아, 왜 망하고(가장 생생한 표현!)말았느냔 말입니다.
최근 저는 한 가지 뚜렷한 까닭을 얻었습니다, 역시 제가 최초의 발견자는 아닐 것입니다만. 시작 지점의 구성원들이 갖는 공통분모가 ‘공동체를 꿈꾼다’는 그거 단 한가지뿐이더라는 사실이지요. 공동체를 구현해내려면 ‘다른 삶의 부분’들이 필요하단 걸 처음엔 간과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것을 두 눈 부릅뜨고 인지하는 것에서 ‘나와 공동체의 갈등’을 바라보는 게 필요하지 않나 때늦은 생각을 해봅니다(그러나 지금도 결코 늦지 않은).

자, 그런데도 왜 골머리 아픈 공동체를 계속 해보려느냐고 물으셨습니까? 같이 하기 참 어려운 줄 알면서 왜 부나비처럼 그리 뛰어들려느냐는 거지요. 홀로는 어려우니까, 사람은 잊기 쉬운 존재니까, 우리는 존재적으로 느슨해지기 쉬우니까, 그래서 같이 모여 일정정도의 긴장감을 갖고 손을 맞잡고 살아보려는 거지요. 그 밖에도 공동체의 장점이야 어디 한두 가지려나요. 흔히 삶은 제로섬(zero sum)이라 합니다. 더하거나 빼거나 결국 그게 그거라는 거지요. 아, 그렇다면 뭐 하러 굳이 힘든 공동체를 합니까? 그것이 포지티브섬(positive sum)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도하는 것 아니겠는지요, 얻는 게 더 많기 때문에!

물꼬(물꼬생태공동체/자유학교물꼬)로 많은 이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공동체살림권으로 들어오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공동체가 지향하는 삶에 대한 최소한의 동의가 있는 이들이 남지요. 특히 자유학교 물꼬의 식구가 되려면 이 동의가 입학을 하는 전제조건이므로(이것은 12학년까지 이 학교를 다니겠다는 결심을 전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가 결국 이 학교를 선택할 거라는 확신에 일시적으로 아이에게는 이 학교를 단기간 다니는 것으로 말해둔다면 그건 이 학교를 입학하는 것에 위배됨을 다시 밝힙니다. 물꼬는 12학년까지 다니겠다는 아이의 자필 서명을 입학등록서로 받습니다. 만약 아이에게 동의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아이가 충분히 준비가 된 뒤로 입학을 미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공동체’와 절대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이 학교가 물꼬생태공동체의 가치관 아래 꾸려지는 학교이기 때문이지요.
이 물꼬는 아래와 같은 이들은 절대사절합니다. 흔히 도회 안에서 모든 삶의 흐름은 반생태적이면서 환경운동같은 것으로 위안받고 적당히 타협하는(모두를 그런 이들이라고 매도할 생각은 추호, 분호도 없음) 이들처럼 내 현재적 생활은 유지하면서 공동체가 주는 좋은 것들만 자신의 삶에 더하겠다는 얌체족, 또 공동체 안에서의 삶은 다른 이가 유지해주어 공동체는 살아있으면서 내게 자극을 주되 내 삶은 이 시대 흐름에 고스란히 맡기며 공동체의 덕만 보려는 부류는 ‘가라’ 합니다.
물꼬를 찾아오는 이들에게서도 흔히 공동체를 희구하는 이들과 다르지 않은 환상을 보게 됩니다. 공동체를 꿈꾸는 그 마음 자체가 외려 공동체적이지 못하기까지 한 경우도 봅니다. 현재의 생활이 지긋지긋하고, 도망가고 싶고, 쉬고 싶고, 지금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꼴 보기 싫으니까, 에서 공동체를 꿈꾸기도 하지요. 이런 마음은 공동체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라는 것이 우리의 지금을 떠난 또 다른 무엇이 결코 아니랍니다. ‘지금’ 벌이는 사투가 있지 않는 한 다른 공간에 간다고 우리 생이란 게 별반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내가 피하고 싶었던 그 문제를 우리는 공동체에 가서도 고스란히 맞딱뜨리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앉은 자리에서 깨달음이 없다면 어디 가더라도 똑같은 문제는 반복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깨달아서 도통한 이들만이 공동체를 꾸린다는 말인가요? 에이, 무슨... 공동체에 흔히 거는 기대를 혹여 한 인간에 대해 거는 기대로 남용하지 말자는 겁니다. 물꼬도 별 수 없이 이 문제투성이의 현대가 낳은 자식들일 뿐이니까요. 물론 이미 특별히 신으로부터 탁월한 인간성을 부여받은 존재들이 있기도 하겠으나 우리는 보통 사람이고, 우리의 출발은 바로 거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모자라,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채울 수 있을 거야, 하는 데서 말입니다. 그런 희망이라면 공동체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지 않을 지요. 냉정하게 그 출발을 안다면 자신에게 거는 기대로도 타인에게 거는 기대로도 받는 상처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으로, 문제를 현상으로가 아니라 보다 ‘원칙과 본질’로(어떤 문제를 자기 ‘처지와 입장’으로 보는 게 아니라)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왜 나는 공동체를 희망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자각 말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를 마치 인간으로서의 ‘자유’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도 자각의 범주겠지요?

공동체는 이 팍팍한 세계를 구원(?)하여 우리를 사람답게 도와줄 희망입니다!

(200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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