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교육 2년 고개를 넘으며

조회 수 9320 추천 수 0 2006.07.29 10:28:00
무상교육 2년 고개를 넘으며

옥 영 경(자유학교 물꼬 교장)


배고픈 이가 먹어야 하듯
아픈 이가 치료를 받아야 하듯
아이들은 아무 조건 없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물꼬가 하는 나날의 교육에 배움값이 없는 까닭입니다.

어른은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 앞에서 교사입니다.
물꼬 공동체 식구는 모두가 교사이되
가르치는 값을 따로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 집안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1. 들어가며

제게는 부자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150여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공장도 있고 종로의 큰 시장에 사업장도 가진, 서울에 집이 몇 채가 되는 그는 지금 경기도 어디쯤에 미술관을 하나 건립 중이지요.
그는 물꼬가 주장하는 무상교육에 자주 시비를 겁니다. 특히 2004년 상설학교로 출발해서 2005년 2년차 막바지에 있었던 학부모와 학교의 갈등에 대해 딴에는 간단한 문제라고 주장했습니다.
“무상교육이 뭐야? 돈 있는 사람은 내야지. 그리고 그 돈으로 없는 사람 돕는 거 아냐? 부모들한테 기숙사비 교육비 다 내라고 해! 그리고 없는 애들한테는 안받아야지.”
물꼬가 도대체 경제개념이 없어 그런 거라고 야단을 치지요.
재정으로 어려워할 때 그는 학부모들이 학교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이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부자로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도 그는 불만을 토로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한국사회에서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부자가 주면 고마운 거고, 안 줘도 말 못하는 거 아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온정은 물꼬를 수년 동안 돕고 있기도 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재산을 나누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보면 새로운 학교현장에 있는 이로서 깊이 생각하게 되는 바가 있습니다. 사회의 공적자금으로 그가 성장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사적자금으로 교육을 받았고 그 힘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혹 그가 사회를 위해 아무것도 내놓지 않겠다 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뼈 빠지게 부모가, 혹은 자신이 번 돈으로 공부했기에 이 사회에 연대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혜택 받은 제도의 경험이 없는 그이기에 혜택 주는 제도에 대한 필요성도, 혜택을 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거지요.
흔히 이 사회에서 물난리가 나거나 불난리가 나면 텔레비전이고 어데고 구제금을 모은다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자연이 혹은 인간이 준 재해 앞에 망연자실 앉았는 이들을 화면으로 지면으로 귀로 들으며 눈물을 짓고 ARS 자동이체 번호를 누르지요. 왜 제도적 장치는 없고 늘 온정과 시혜에 의존하는 걸까요? 왜 제도적 장치를 만들지 않는 것일까요? 혹 법 실행자들 역시 공적자금으로 그 자리에 간 게 아니라 죽도록 고생한 사적자금으로 갔으니까 그들에겐 제도의 필요성에 공감이 깊지 않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요? 제도가 준 혜택의 경험이 일천하기에 더욱 그러한 건 아니냔 말입니다.
거기다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으므로 그래서 제도화에 집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재해를 이길 보험을 많이 드는 수밖에(역시 자기 주머니로) 도리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정말, 과연 길이 없는 걸까요?

물꼬(물꼬생태공동체/자유학교물꼬)의 꿈은 소박합니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픈 사람이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돈이 없어 교육을 포기하는 아이가 없기를 바랍니다.
물꼬의 무상교육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아이가 가난하다는 까닭으로, 외국인이라는 까닭으로, 피부색이 다르다고, 남자라고, 혹은 여자라고, 장애가 있다고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고 누구나 그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인간적인 당위에서 발걸음을 뗍니다.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묵과하는 사회, 점심을 먹지 못해 평생을 지고 갈 몸을 망치는 아이들이 넘쳐나는 사회에 대한 분노가 함께 들어있는 거지요.


2. 무상교육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흔히 덥석 이해하기로 교육에 있어 피교육자가 돈을 내지 않는다고 이해되는 무상교육(무상교육제도)은 정말 무엇일까요?
민중서림에서 나온 국어사전은 무상교육(無償敎育)을 이리 정의합니다.
“자녀가 받는 교육에 대하여 보호자가 직접으로 대상(代償)하지 않는 교육(이 경우 교육비는 교육세 등의 조세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지급함)”
표준국어사전은 또 이리 쓰고 있지요.
“[교육] 교육을 받는 학생에게 일체의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고 무료로 실시하는 교육. 주로 의무 교육 과정에서 실시한다. ¶생활 보호 대상자의 자녀들에게 무상 교육을 실시했다.”
앞의 정의대로라면 자녀가 받는 교육에 대하여 보호자가 직접적으로 돈을 내지는 않지만 세금을 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뒤의 정의를 빌자면 교육을 받는 학생에게 일체의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고 무료로 하는 교육으로 주로 의무교육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하니 교육에 관계한 돈이 아이 부모에게서 나갈 일은 없는 교육이 무상교육이겠습니다. 역시 앞의 정의대로라면 세금을 내니 사실 돈을 직접적으로 내지 않는다 뿐이지 사실은 돈을 내는 것 아닌가요? 또 뒤의 정의를 따르자면 현재 의무교육인 초등학교(사립은 차치하고라도)에서 부모가 현장 학습비를 내는 것, 학습교구를 사는 것, 급식비를 내는 것들은 다 무엇일까요? 더 이상 초등 1학년 교실에선 한글을 가르치지 않는다 하니 학교를 가기 위해 한글을 깨우치는 데(가정에서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드는 비용은, 학교 진도가 학원을 다닌 아이들을 전제로 하고 나아간다면 그 학원비는 도대체 다 무어란 말입니까? 딱 잘라 무상교육이 아니라고 말 못할 것도 아니지요.
사전에서 정의했던 것을 보더라도 무상교육은 교육자금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와 뗄 수 없는 말입니다. 교육의 자금이 누구의 주머니로부터 나오느냐에 무상교육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무상교육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비를 수혜당사자가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구성원들이 형성한 공적자금을 가지고 행하는 교육!”
관건은 공적자금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있겠네요.

자, 그럼 이 무상교육은 이 사회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걸까요?
첫째, 무상교육은 없는 이들이 없기 때문에 하는 좌절을 희망으로 바꿔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배움에 대한 갈망은 얼마나 목마른 것이더이까. 돈이 없어 교육의 길이 끊어지는 일이 사라지니, 가뜩이나 희망이 없다는 이 시대에 희망 한 가닥(아주 단순하게는 교육을 통해 계급상승을 흘끔거린다든지) 지니는 게 가능하지 않겠는지요.
둘째, 자기 삶에서 자연스레 섬기고 나누는 삶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도적으로 받았던 경험이, 줄 수 있는 여유와 책무의 토대가 된다는 거지요. 자신의 삶이 무상교육을 뒷받침하는 이들의 노고에 힘입으며 만들어졌기에 그는 자연스레 그것을 타인과 나누려 할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음을 느끼며 다른 존재를 섬기는 일에 게으를 수 없겠지요. 말로의 나눔과 섬김이 아니라 제도를 통한 직접적인 몸의 배움이 있었기에 이 제도는 한 개인으로부터 아주 강한 사회연대의식을 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무상교육제도는 앞 세대와 뒤 세대 사이에 끈을 강하게 할 것입니다. 아비 어미들이 지혜를 나눠주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식들이 살아갈 교육 자본을 만들어 주었으니까요. 물론 사적자금 안에서도 이것은 가능하겠습니다만, 전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일은 각 가계사를 넘어 사회 전체적인 세대와 세대 사이의 짙은 유대를 만든다는 거지요. 또 있는 자가 공적자금에 더 기여함으로서 있고 없음의 계층 차이를 일정정도 극복케 해주기에 없는 이들이 있는 이들에 대해 갖는 적의나 상대적 상실감도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이것 역시도 사회연대의식을 강화시켜주는 일이겠지요. 무상교육제도의 혜택으로부터 우리는 이 세상이, 이 나라가, 이 사회가 나랑 무관하지 않구나 하는 사회에 대한 강한 고리를 갖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앞에 나열한 것들과 크게 무관하지는 않겠는데, 한 인간의 가슴 속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지를 심어줄 수 있겠습니다. 자긍심이란 것은 어떤 상황 어느 곳에 서 있을 지라도 자신에 대한 큰 긍지로 한 인간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올곧게 서게 하는 큰 덕목이지요. 건강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무상교육의 혜택을 받은 이의 자긍심은 궁극적으로 그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토양 한 켠이 될 것입니다.


3. 물꼬의 무상교육실험

그런데 왜 한국사회는 무상교육을 못하고 있는 걸까요? 왜 그것을 주장하는 것조차 드물까요? 교육비지출로 따지자면 이미 그걸 구현하고도 남을 돈이 교육시장에서 돌고 있는데 왜 이 나라에서는 무상교육이 불가능하냐 말입니다.
이 벅찬 무상교육을 국가에서 할 수 없다면 정녕 길이 없는 걸까요? 사회구성원들을 설득해서도 안 된다면 어떤 한정된 공간에서 실험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물꼬가 2004년 상설학교로 문을 열며 그 실험에 나섰습니다.
교육을 투자의 개념으로 보는 현 세계의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는 한은 서로 더 많이 투자하는 경쟁의식, 투자했으니 뽑아야 한다는 보상의식, 그리고 그렇게 교육받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특권의식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물꼬는 터무니없이 무너져 내렸던 삼풍백화점(1995년)과 같은 부실한 세상, 거짓된 세상에 바로 현재의 교육이 거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며 그것에 대해 저항하고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한 길이 무상교육이라 굳게 믿습니다.
십년 전 고작 서너 곳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 100여 군데 가까이 대안학교라는 이름을 걸고 있다는데 한결같이 높은 기부금 출자금 입학금 등록금으로 또 하나의 계급사회를 만들고 있지 않던가요.
물꼬는 무상교육을 하는 유일한 산골공동체배움터로서(대안학교로 불리고 싶지 않은 의지로)가난이 교육의 수혜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실험의 기초를 잘 다져나간다면 무상교육이 보다 확대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물꼬가 1989년 ‘열린글 나눔삶터’로 출발하면서부터, 혹은 1994년 첫 계절자유학교를 다녀오면서부터 무상교육을 꿈꿀 수 있었던 건 아닙니다. 굳이 좌파가 아니더라도 무상교육, 얼마나 환상적인 꿈인가요. 하지만 거대한 자본 아래서 언감생심이었지요.
그런데 1998년 무렵 교육비에 대한 생각은 이렇게까지 나아갑니다.
“저희가 아직도 (상설학교를)'준비 중'인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하려는 일이 또 하나의 '엘리트 교육'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는 스스로 생산수단을 갖추려고 합니다. 지역 안에서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은 최소로 줄이려고 합니다. 보통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비용보다 결코 많이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도 물론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듯한 학교 틀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
라 몸이 불편한 아이들도 아무런 문제없이 생활할 수 있게 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휠체어를 탄 아이,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 목발을 짚은 아이도 좀더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시설만은 꼭 갖추고 싶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 저희는 10년이라는 시간을 '준비'하겠다고 처음 시작할 때 약속했습니다.”(출처; 1998년 물꼬 안내글)
이것은 상설학교 문을 열기 반년 전, 다음과 같이 발전하게 됩니다.
“1) 물꼬가 하는 나날의 교육(일상교육)에서는 배움값이 없습니다.
2) 물꼬의 후원제도(논두렁)를 통해 학교살림을 보탤 수는 있습니다(아주 적은 돈도 자신의 이름으로, 까무러칠 정도로 많은 것도 이름 없이 낼 수 있는 자유로움으로).”(출처; 자유학교 물꼬 ‘학교 큰틀’, 2003.11.1)
그것은 공적자금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물꼬생태공동체가 살아갈 방향에 대한 의지가 굳건해지면서부터였지요.
그리고 마침내 2004년 삼월삼짇날(음력), 자유학교 물꼬는 배움값을 받지 않는 무상교육을 천명하며 상설학교의 문을 엽니다!

그런데 자유학교 물꼬는 어떤 학교일까요?
자유학교 물꼬는 초중고 12년제 산골공동체배움터입니다.
“스스로를 살려
섬기고 나누는 소박한 삶
그리고, 저 광활한 우주로 솟구쳐 오르는 나!”
물꼬가 지향하는 교육은 위와 같은 학교 이념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교육을 통해 얻고자 하는, 좋은 대학, 좋은 직업, 높은 계층이라는 의도와는 분명 다릅니다.
“스스로를 살려 : 자립.
경제적인 자립을 넘어 세상 어디에서든 홀로 설 힘
섬기고 : 우주에 깔린 절대적인 힘에 대한 경의, 타인에 대해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
나누는 : 우리가 배운 것들이 나를 넘어 우리를 넘어 이 우주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삶.
소박한 삶 : 생태적(단순) 삶.
그리고 저 광활한 우주로 솟구쳐 오르는 나 : 개인의 자유, 자아의 완성!”
아이들은 하루의 절반은 지식을 위한 시간으로, 나머지 절반은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생활합니다. 1-8학년까지는(2006년 현재, 1-6학년까지 있음) 한 교실에서 공부하며 9학년부터는 자기 시간표에 따라 어른들의 지원을 받으며 스스로 공부해나가지요. 12학년 때는 1년 이상 다른 나라의 공동체에 머물며 대학을 갈지 말지 무엇을 하고 살지 공동체에 남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삶의 큰 기로에 서게 됩니다.
처음에는 물꼬의 가치관과 교육에 동의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아이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설학교로 첫 해를 보낸 뒤부터는 먼 거리에 의한 차량이동(달마다 한 차례 아이를 데리러 오거나 학부모모임에 참석하기위해)이 반생태적이지 않은가 하는 자각으로, 또 삶터와 배움터가 함께 가야한다는 물꼬교육기초조건에도 위배되기에 이듬해부터는 입학조건이 지역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즈음 물꼬는 공동체식구가 되든 마을식구가 되든 삶 터 안에서 부모 삶과 아이의 삶이 괴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하고 있었지요. 자신의 삶을 물꼬가 지향하는 삶에 같이 놓고 바라보고 그리 살아가려는 의지를 지닌 경우에만 아이들이 입학할 수 있노라 전형이 까다로워진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이만 자연 안에서 자유롭게 공동체식구로 살게 하겠다는 이는 더 이상 입학대상일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상설학교 3년차로 접어들면서는 지역성이 더 뚜렷해집니다. 아이가 학교를 들어오고 적어도 1년 이상은 함께 움직이며 여태 살았던 문화와 전혀 다를 수도 있는 문화를 받아들임에 있어 보다 수월하도록 하는데 기숙사의 필요성이 여전히 있다고 보아 기숙형을 유지하며, 부모들은 하나의 살림으로 묶인 공동체식구로 혹은 곁에서 살아가는 마을 식구로 함께 하게 됩니다.
나아가 ‘부모가 필요한 아이들’에게 부모가 되고자 하는 물꼬 공동체 식구들의 작은 소망을 학부모들까지 공유하게 됨으로서 내 새끼만 잘 키우겠다는 부모의 이기를 넘어설 수 있는 장치도 가지게 되었습니다(2006학년도; 부모 없는 아이도 입학). 이 산골공동체배움터는 해를 거듭할수록 버림받은 아이들이 공동체에서 삶의 건강한 꼴을 찾아가는 좋은 장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무상교육이 가능하려면 ‘공적자금’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물꼬는 지난 2년 어떻게 공적자금을 형성하고 있었을까요?
물꼬의 생각에 지지하고 동의하는 이들(‘논두렁’이라 불립니다)의 후원금, 아이를 실제 같이 키우고 있는 학부모의 보시(너무나 어려워 한 푼도 보태지 못하는 이도 있으며 몇 십만 원을 보태는 이도 있지요), 그리고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물꼬생태공동체의 후원으로 학교가 꾸려지지요(2006년의 생산공동체가 본격화하면 학교 살림도 훨씬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여기에 다행히도 임금으로 나가는 비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물꼬생태공동체가 지향하는 삶과 교육에 자유학교 물꼬가 놓여있으니 학교를 지원하는 것은 그냥 공동체의 중요한 소명일 뿐이지요. 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연스런 삶의 한 부분입니다.
가난한 살림엔 할 수 없는 게 많지요, 이 거대한 자본 중심의 사회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물꼬 역시 가난은 큰 벽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게 그리 많지 않다는 생태적 삶의 지향이, 또 실제 그리 살아감으로 그 벽이 그리 대수로울 것은 또 아닙니다.
물꼬가 이 사회와 결코 동떨어져 살아갈 수는 또한 없기에 물꼬를 벗어나 밖으로 나갔을 때 물꼬 역시 돈의 제약을 받고 이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학습을 하고플 때 돈을 지불해야하는 경우도 있지요, 가령 어디 현장학습을 가서 입장료를 낸다든가 하는. 할 만하면 할 것이요, 못할 것 같으면 이곳에서 얻어지는 다른 덕으로 환산하며 포기하면 그만입니다, 어차피 가난은 우리의 자발적 선택이었고 그것 때문에 잃는 것 또한 있기 마련일 것이니.
돈이 절대적인 사회에서 돈이 의지를 꺾지 않더라는 경험을 하며 사는 이들의 삶이, 또 돈 없이도 가치가 실현되는 이곳의 기적이 자본주의 삶에서는 이해가 어려울 것이며, 돈이 교육의 에너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학교의 방식은 너무나 낯설 것이고, 또 자본주의 아래 살아가는 이들에겐 월급도 없는 교사 자리가 아득할 테지만 그것을 이 시대의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옳고 그름으로 말할 것은 더욱 아니겠습니다.


4. 재정기반이 약한 물꼬는 정녕 무상교육이 불가능한 것일까?

“좋기는 한데 돈은?”
많은 사회구성원들이 무상교육에 대해 별 고민이 없는 것에 견주면 그나마 이런 반응이라도 하는 이들은 고맙기까지 하지요. 그렇지만 무상교육을 관심 있게 생각했던 이들조차 결국 재원을 어디로부터 가져올 거냐에 그만 주저앉고 맙니다.
앞에서 말했던 무상교육의 재원은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공적자금으로 합니다. 공적자금이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국민들이 낸 세금이 축이었습니다.
역시 그렇다면 한 학교에서 공적자금을 만드는 일은 그 학교구성원들(직접적인 관여든 간접적인 관여든), 그러니까 그 학교를 함께 꾸려가는 이들의 공동책임이겠지요.
그런데 자유학교 물꼬는 아주 작은 공간이고 그 구성원들 또한 규모가 작습니다. 그런데도 물꼬가 열악한 물꼬의 공적자금에도 무상교육을 내걸 수 있는 것을 일정정도 이해하려면 그들의 삶의 방식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꼬가 지향하고 또한 지금 살아가는 방식의 소박함이 직접적인 생산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재정 문제를 일정정도 덜어주기도 하니까요. 생태라고 이름 할 것까지는 없더라도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물꼬는 전지구적으로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도 생계를 걱정하고 사는 삶에 반기를 들며 소박한 삶을 주장하고 실제 그리 살고 있습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쓰고 살면 다른 사람이 쓸 게 줄며, 인간이 지나치게 많은 걸 쓰고 살면 다른 존재가 쓸 게 모자란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확대하면 물꼬는 돈이 교육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방향을 교육으로 보기에 물꼬에서의 교육비는 다른 공간에서의 교육비에 견줄 대상이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산골 폐교를 빌려서 쓰는 살림이라 그 살이가 만만찮을 텐데, 재정기반이 약한 물꼬에서 무상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물꼬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물꼬를 거쳐 간 숱한 이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학교입니다. 물꼬 역사가 십수 년이 넘는 동안 방과후공부와 계절학교를 통해(그런 와중에 저소득층 아이들의 공부방과 고아원공부를 통해 물꼬의 뜻을 나누기도 했지요) 손을 보탠 사람들의 인력비가 고스란히 수익으로 남아 적립했고, 물꼬를 지지하는 후원자들(특히 경제적인)의 돈을 하나도 허투로 새지 않게 모아 올해는 기숙사 두 동을 짓는 토대가 되었지요. 지금 학교의 실체가 있고도 그리 많은 수가 아닐진대 그때 앞으로 다가올 알지 못하는 미래를 보고 도와준 이들(비록 몇 분이 되지 않았지만)은 얼마나 소중한 분들인지... 거기에 상설학교로 출발하고도 물꼬생태공동체에서는 계절학교를 철마다 꾸려 수익금을 고스란히 더해 그 집을 마무리 했습니다.
학교는 공동체 식구들의 지원뿐 아니라 바깥샘(자원봉사)들이 함께합니다. 2004학년도엔 영동대 원어민일어교수 원어민영어교수의 자원봉사에 한국화 검도 스포츠댄스를 가르치는 이들이 있었고, 2005학년도엔 앞에 열거한 공부에다 피아노특강 연극특강 서양화특강들이 있었으며, 2006학년도 올해는 단소 춤 수영 한국화 국선도 영어교사들이 아무런 댓가도 없이 이 교육의 뜻에 동의해 그들의 손발을 더하고 있습니다.
역시 상설학교로 출발하고도 물꼬는 품앗이 일꾼이라는 자원봉사자들 손으로 학교를 다듬어왔지요, 농사도 짓고 학교에 필요한 작업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나무하고 장작을 패는 일까지.
거기에다 물꼬는 물꼬생태공동체가 농사를 짓고 계절자유학교를 해서 얻은 수익금으로부터 먹을거리와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고 무엇보다 인력을 지원받아 학교를 꾸립니다. 지금 학교를 지탱하는 주요 인력은 모두 물꼬생태공동체식구들이지요. 그들은 학교로부터 어떤 임금도 받지 않으며 다만 물꼬생태공동체로부터 달마다 5만원의 용돈을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역사 속에 태어나고 자란 학교에 무임승차하고 학교를 꾸리는 일에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 “무상교육은 교육의 수혜자가 돈을 부담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학부모가 나 몰라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물꼬를 뿌리째 부정하고 뒤흔드는 것이며, 그것은 이 학교에서 그가 떠나야할 명백한 까닭이 될 것입니다. 물꼬에 손발을 보태고 소망을 보탠 이들이 “그런 학부모의 이기를 채우자고 내가 존재했던가.” 하며 어찌 개탄치 않겠는지요.

그래서 물꼬는 여전히 학부모들에게 말합니다. 공적자금을 형성하는 일, 사람들이 물꼬 생각에 동의하고 지지하고 격려하기 위해 내는 후원처럼 당신 역시 후원회원이 되어 달라고, 그것이 아주 애쓴 당신의 노고라면 천원이든 기십 만원이든 물꼬에겐 동일한 거라고 말입니다.


5. 물꼬에게 남은 숙제

물꼬는 무상교육 2년 고개를 넘고 3년차를 맞았습니다. 이 나라에서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부모도 학교도 모르는 게 많았겠지요. 아이들은 잘 자랐으며 모두 행복해했으나 정작 서로 소통되지 못한 어른들은 오해를 빚으며 가장 좋지 못한 방법으로 갈등을 드러냈던 일까지 있었습니다. 음식은 보면 볼수록 주는데 말은 하면 할수록 더해진다던가요. 물꼬는 정말 무참해져버렸지요. 그 갈등의 가운데는 무상교육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학부모들은 다른 후원회원들처럼 학교에 하고 있는 후원비를 아이들의 생활비를 낸 것이라 굳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아, 그렇다면 교육은 무상이라 하였으니 그건 당연한 게 되나요). 할 만치 했고 그래서 학교에 낼 것 다 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40만원이 학교를 위해서 쓰였다는 부모의 사정을 들어보면 20만원은 후원을 했고 절반은 오가는 비용으로 썼다는 계산입니다. 학교는 오가는 비용을 받은 바가 없으니 학교 재정이 아닌 거고 부모는 그 돈을 썼으니 아이를 보내는데 든 돈과 진배없었던 거지요(이 예는 상황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들었을 뿐 떠난 그를 비난하고자 하는 마음은 터럭만큼도 없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를 어느 누구보다 물꼬에 우호적이고 가장 애썼던 이였다고 기억하며 고생한 그에게 큰 고마움으로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음을 이 글을 빌어 전합니다.). 학부모들의 그 계산대로 따지자면 학교는 나날이 하는 배움값을 빼더라도 기숙사비(지난 2년 동안은 아이들이 달마다 한 차례 주말에 집을 다니러 감. 지금은 주말마다 마을에 있는 집에서 아이들이 보냄), 교육비, 예술체육활동 과외비, 차량 운행비, 급식비를 어떻게, 얼마나 책정해야 하나요? 게다가 학부모가 할 바를 다했다고 해서 학교가 애쓴 부분들이 사라지는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무상교육에 대한 다른 이해’의 강은 너무나 넓어서 학부모들과 물꼬가 서로 보이질 않았습니다. 학부모들은 무상교육은 교육수혜자가 돈을 내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고, 학교 쪽에서는 다른 후원인들처럼 형편에 맞게 학교를 지원할 보시의 의무가 학부모에게 있는 것 아니냐 물었지요.
자유학교 물꼬의 무상교육은 학교 구성원들이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존립의 위기에 서있다면 해체하거나 살리거나 길은 두 개밖에 없는 거지요. 물꼬의 공적자금의 형성이 어느 한쪽을 피 흘리게 하며 굴러간다면 오래지 않아 수레는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자유학교 물꼬가 물꼬생태공동체 식구들의(물론 스스로 선택한 길이고 최선을 다하지요. 희생이 아니라 헌신을 통해 학교일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 이 산골에서 반자본주의적으로 사는 일은 너무나 고달프지요) 노력으로만 굴러간다면 그 생명이 오래 갈 수 없다마다요.
무상교육은 부모가 교육재정에 대해 안이해도 된다는 혜택이 아닙니다. 물꼬를 선택했다면, 부모 스스로는 먼저 해야 할 일의 차례를 정하는데 있어 고려대상의 맨 아래 칸에 물꼬가 있지는 않은가 하는 끊임없는 자각이 있어야합니다. 맨 꼭대기에 물꼬가 있어야 한다고 강요할 순 없더라도 다른 사항처럼 중요하게 물꼬의 자리가 있어 물꼬가 지향하는 삶, 그리고 아이들이 나아가는 바를 같이 보며 부모도 그 가치관을 공유하려고 애쓰고 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학교를 지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아이를 자신이 거두고 있다 해도 현실적으로 이러저러한 게 들겠구나 하고 구체적으로 살피고 헤아려도 준다면 더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겠지요).
물꼬는 일하고 살아가는 일을 효율의 측면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먹고사는 일의 엄중함을 인간 삶의 소중한 근원으로 보고, 또 인간 공동체의 건강성을 우리 삶의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이건 고스란히 물꼬의 교육과정에 드러나며 그 교육을 부정한다면 굳이 이 학교를 지원할 필요가 없지요. 내 아이의 초등시절을 그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게 하고 싶다는 소망, 혹은 이것도 쥐고 저것도 쥐려는 중산층의 이기나 채우자고 물꼬가 이 산골에서 이런 쉽지 않은 삶(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거친)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랍니다.
물꼬는 이곳의 삶이 자본주의의 바깥 삶에 휘둘리지 않게 지난한 일상을 힘차게 꾸려나가며 부모들이 자신의 이기에 끄달리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실제 그 교육하는 바처럼 물꼬 스스로도 그같이 살아가야하는 큰 숙제를 늘 안고 있겠습니다.


6. 엄지손가락 치켜들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통해 스스로를 더 잘 규정하는 일도 있지요.
지난 2월, 물꼬 홈페이지 한구석에 물꼬의 10년지기 자원봉사(품앗이)자 함형길님이 어떤 이의 글에 대해 댓글로 이리 쓰고 있었더랍니다.

“(생략)
그러나 '자유학교 물꼬'는 '누구나 비슷하게 그러해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수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님도 분 명 히 아시리라 여겨집니다만, 물꼬의 교육이념과 신념, 교육과정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모든 기반의 운영은 '생태공동체'를 밑바탕으 로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고 싶은 사람은 여기 여기 붙어라!'와 같다고 저 는 생각합니다. 치켜든 엄지손가락에 동의하지 않으면 다른 손가락을 찾으면 됩니다. 엄지손가락이 그 마을의 모든 재미와 웃음을 책임져야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러고 싶은 엄지손가락도 아닐 겁니다.
물론 님의 걱정대로 '나간 학생 열과 백"에 대해서 자유학교 물꼬가 고민하고 반성해 야 할 점이 있다면 분명 그리 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자유학교 물 꼬의 몫이지, 그 공간에서 살아가지 않는 이들의 몫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꼬는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들고 소리칩니다, 물꼬의 이 같은 무상교육에 동의하고 같이 살 사람은 여기 여기 붙어라 하고.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 삶이 늘 그렇듯 자신의 다른 길을 가면 될 것입니다. 그 길에서 부디 행복하시길, 우리가 그러하듯 진정 그대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맑스가 <자본론>의 서문에서 단테의 <신곡> 연옥편의 한 구절을 그리 옮겼던가요.
“너 자신의 길을 가라, 누가 뭐라든.”
지옥의 문 앞에서 그리 소리쳤을 플로렌스 인을 생각합니다.

(2006년 삼일절)

* 덧붙임:
엄지손가락을 잡은 이에게 늘 하고팠던 한 마디! ‘공동체’란 것에 대한 지나친 환상과 공동체구성원에 대한 큰 기대는 제발 접고 오십시오. 공동체도 이 사회에서 길러졌던 이들이 사는 곳이니 한 사람 한 사람 모자란 구석이 많을 밖에요. 그래도 공동체가 매력 있는 건 내가 덕이 모자라면 곁의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고(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정진을 포기한다는 게 아니라) 네가 없는 것은 또 다른 이가 가졌기에 서로를 메우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이제 준비된 그대에게. “공동체에선 살아 숨쉬는 생명들이 갖는 경이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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