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

우리마을 반장은 열여섯 살, 바로 접니다-엄마는 부녀회장, 나는 반장... 첫 임무는 비료 신청 받기

 

 

 

우리 마을 반장은 열여섯 살, 바로 접니다

엄마는 부녀회장, 나는 반장...첫 임무는 비료 신청 받기
13.03.27 10:06l최종 업데이트 13.03.27 18:50l

 

 

 

충청북도 영동군 산골짝에는 '대해리(大海里)'라는 마을이 있다. 바로 우리 집이 있는 마을이다. 웬 '큰 바다 마을'이냐고? 어느 때 큰 불이 나서 이름에 물 기운을 주었다는 얘기가 가장 그럴 듯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옛날 옛적 바다 같은 큰 호수와 청둥오리가 있었노라는 전설을 꾸미기도 하신다. 하지만 아마도 좁은 마을입구를 들어와서 마주치는 넓은 분지가 사람들에게 바다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  대해리 사진
ⓒ 류옥하다

관련사진보기


우리 마을 가구는 약 70호로, 총 다섯 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를 중심으로 앞마을에 아래뜸과 위뜸인 1, 2반이 있고, 학교 뒤로 댓마가 3반,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면 새마을, 골짜기 입구엔 흘목(흙목이라고도 쓰고 헐목이라고도 읽는다)마을이 있다. 우리 집은 1반인 '아래뜸'에 속한다.

며칠 전, 아래뜸 반장님이 일을 그만두시는 바람에, 새 반장을 선출하기 위한 마을 회의가 열렸다(동시에 부녀회장도).

"나는 농사일이 바빠서…." 
"나는 했는디…."

그러다 어르신들이 마을에서 가장 젊은, 만만해보이는(?) 우리를 자꾸 찌르셨다. 

"마을에 들어온 지 10년도 훨씬 넘었는데, 이제 마을일도 좀 햐아."
"아, 바뿌기야 바뿌지. 그래도 젊은 사람이 햐아."

어머니가 고사하시니, 

"여, 하다가 하면 되겠네. 하다도 이제 저렇게 컸는데 심부름도 하고 마을일도 하면 되것다. 니가 해라!" 

'어어어~' 하는 사이 집에 돌아와 정신을 차리니 어머니는 부녀회장, 나는 반장이 되어있었다.

반장에게 주어진 첫 임무, 비료 신청 받기

"이장 말 잘 들어야 혀!"

반장의 업무는 '이장 보조'. 이장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면 된단다. 첫 임무는 비료 신청 받기. 먼저 마을 사람들의 명단을 받아 명부를 작성했고 집집마다 전화를 드렸다. 산골짝은 전화도 조금씩 지직거리고, 어르신들이 말을 못 알아들으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큰 소리로 말씀 드려야 한다.

"비료 신청 하셔야 돼요!"

전화를 드린 다음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비료 신청서에 사인을 받았다. 항상 심부름을 가도 '키 큰 할머니', '이모 할머니', '쌍둥이네' 이렇게 부르다 보니 동네 사람들 이름은 얼핏 듣기만 했었는데(별로 관심도 없었고) 심부름은 이름으로 하다 보니 1반 20명의 이름을 외우느라 바빴다. 나는 프린터로 뽑은 명단 옆에 깨알 같은 글씨로 '검은 대문 집' 이렇게 적어놔도 겨우 외울까 말까 하는데, 낼모레 환갑이신 우리 이장님은 "마을 명단 좀 적어주세요"라고 하니 70여 호의 이름을 그 자리에서 다 적어내신다.

심부름을 하면서 어두컴컴하고 쌀쌀한 저녁에 따끈한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차와 다과를 마시며 마을 어르신들과 담소를 나누는 재미가 쏠쏠하다. 반장 일을 맡고 나니, 규산질 비료는 얼마나 뿌리는지, 패화석 비료는 뭔지, 석회고토는 어디에 쓰는 건지 알게 됐다. 잘 몰라도 어르신들이 "이건 여기에 뿌리는겨" 하고 말씀해주신다. 앞으로 배울 게 많겠다.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반장을 맡길 잘한 것 같다(절대로 이장님 댁의 달콤한 '마 차'와 강정 때문은 아니다!).

이럴 수가... 반장의 길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저녁을 먹고 이장님 댁에 비료 신청 서류를 정리하러갔다. 어머니, 이장님과 함께 서류에 각각 이름, 주소, 주민번호, 연락처, 농사짓는 땅 번지를 농지원부에서 찾아낸 후 손으로 적고 날짜를 쓰고 도장을 찍었다.

"휴~ 다 했다!"

그런데 옆에서 이장님 왈,

"이게 첫 장이여!" 

이럴수가…. 반장의 길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  비료 신청서
ⓒ 류옥하다

관련사진보기


밤 10시가 돼서야 일을 마치고 '마 차'와 강정도 먹은 뒤(하핫), 이장님 댁을 나섰다. 

"안녕히 계세요!"

옆에서 우리 이장 사모님께서 "우리 동네 반장님은 열여섯 살, 최연소 반장이네, 최연소!"라며 웃으신다. 

PS. 마을 임원은 공식적으로 미성년자가 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반장 직함을 받으시고, 일은 제가 하기로 했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물꼬를 다녀간 박상규님의 10일간의 기록 [5] 박상규 2003-12-23 106716
5855 옥샘! 입금확인이요! secret [1] 전경준 2009-12-14 1
5854 옥쌤 급해용 secret [3] 오인영 2010-01-02 1
5853 옥쌤 secret [1] 태우 2010-03-14 1
5852 불 피해는 없으십니까? secret [1] 최선생 2010-03-29 1
5851 옥샘 잘지내시죠? secret [2] 연규 2010-04-13 1
5850 옥샘께. secret [1] 김유정 2010-04-22 1
5849 장기기증에 대하여... secret [1] 호성 2010-06-06 1
5848 옥쌤!부탁드려요! secret [2] 오인영 2010-06-12 1
5847 옥샘.... secret 희중 2010-06-26 1
5846 옥샘 보세요 secret [1] 조양정 2010-07-13 1
5845 옥쌤! secret [3] 수현 2010-07-15 1
5844 옥샘보세요 secret [1] 조양정 2010-07-19 1
5843 옥쌤 잘 지내시죠? secret [3] 수현 2010-09-17 1
5842 옥쌤~안부전해드려요!!~ secret [2] 경이 2010-09-27 1
5841 옥쌤!~ 몽당계자갈게요 secret [2] 경이 2010-10-12 1
5840 잘지내고 계시지요? secret [1] 최영미 2010-12-06 1
5839 할머니♥ secret [2] 진주 2010-12-12 1
5838 옥샘.. secret [2] 희중 2010-12-14 1
5837 겨울계자 secret [1] 연규 2010-12-16 1
5836 옥쌤!! secret 윤지 2010-12-26 1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