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에세이 내용은 의예과 M2 'Critical thinking' 과목의 과제물이며, 해당 과목의 형식과 조건, 평가 기준에 따라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Critical thinking 3주차 에세이(2018.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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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는 의학자로서 질병을 연구하고, 진단하여 사람을 치료한다. 그렇다면 의사의 역할은 사람을 치료하는 것에 국한되는 직업일까? 치료 한다면 어느 수준까지 치료하는가? 물건을 고치는 공학자와는 분명 다른 것 같은데, 의사로서 사명이 존재하는가? 과학자는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데, 의사도 환자를 연구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데에 제한이 존재하는가?
     
  이런 고민들은 의사가 되는 길로 진입한 이후 줄곧 떠오르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의사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 내가 왜 의사가 되려는지를 치열하게 밤을 새가며 사유했던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쾌락과 공부, 17도의 알콜과 벚꽃, 단풍의 향기에 초등학생인 냥 타성에 젖어있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인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다양한 사례와 연구를 통해 우회적으로 어떤 의사가 될지 생각의 여지와 질문을 던진다. 
     
원인의 원인에 관하여
     
  먼저 저자가 질병에 접근하는 방식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왔던 범위와 살짝 다르다. 저자는 다양한 연구들을 보여주며 병에 걸리는 것이 그것의 원인에 의한 것보다 ‘원인의 원인’(즉, 피상적인 원인이 아닌 사회적, 심층적 원인) 에 의해서라고 말한다. 국제적으로 제 3세계의 환자들이 우리보다 질 낮은 치료와 관심을 받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더 낸다면 전문적인 진료를 받으며 기술적으로 진보된 치료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범위를 우리 주변으로 돌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교를 갈 형편이 안 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한 비정규직 친구들, 연탄봉사에서 뵈었던 기초생활수급자 노인 분들, 시골집의 결혼 이주여성은 낮은 영양상태, 스트레스, 사회적 관심의 부족으로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을 것이다.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 된 결혼이주여성과 성 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P7)
     
  이것들은 이 사회의 시스템의 문제이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전문가들과 정치인들, 다양한 사회 직군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 ‘사회 ’시스템‘의 문제 아닌가,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과연 그런가? 조금만 신경 쓰면 애초에 병이 일어나지 않게 할 방법들이 있다.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를 방치하며 돕지 않는 사회에 해고자 한 명당 10만 원 정도의 투자로 자살자를 낮출 수 있다면? 정부가 개입하여 HIV 치료제를 제공하여 평균 수명을 십 수 년씩 높일 수 있다면? 산모에게 임신 기간에라도 태아를 위한 치료제를 제공하여 이후 태아의 50대 생존율을 두 배로 높일 수 있다면?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떨까? 의사들이 치료하는 사람들, 신기술과 신약을 통해 개발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라면 이것이 도리어 의사의 의무에 들어가는 범주가 아닌가. 정말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라면 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회 문제는 그렇지 않다.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일찍이 스위스의 사회학자이자, UN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Jean Ziegler, April 19, 1934)가 세계의 불평등을 비판하던 저서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어보면 이런 시각은 확고해진다. 세계의 식량은 120억 명분(1999년 기준)이지만 8억 명이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수백만 톤의 곡물을 가격 유지를 위해 소각하거나 바다에 버린다. 마찬가지로 미국, 한국, 일본에서는 상당수의 의약품이 과용, 오용되거나 버려지지만, 같은 나라의 저소득층, 제 3세계에서는 진통제 한 알, 결핵 약 몇 알이 없어 무수한 사람들이 세상과 이별하고 있다.
     
“그들은 개개인이 감염 되었던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치료약을 제공받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인해 죽었던 것”(P67)
     
  이런 상황에서 과연 피상적 현상에 대한 ‘치료’나 ‘수술’을 맡는 것만이 의사의 의무일까? 우리가 대단한 사회 운동가나 혁명가가 되자는 과격한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그럴 만한 시대도 아니고. 그러나 의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의사의 존재 자체가 사회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면? 우리는 진료실에 앉아 수동적으로 치료, 수술만 해야 하는가.
     
‘제네바 선언’에서 발견하는 의사의 ‘진보’성
     
  현대판 히포크라테스 선서라 불리는 ‘제네바 선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인류에 봉사하는 데 내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
     
  해석의 나름이지만, 나는 이 문장이 의사가 기계적으로 중립을 지키거나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료와, ‘원인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사회에 개입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의사는 사회적으로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여기서 말하는 ‘진보성’이란 상투적으로 쓰이는 정치, 사회에서의 진보가 아닌 ‘생물학적 진보론’에 가깝다. 즉, 진화적으로 익숙한 것(유전자를 덜 공유한 타인을 배척하고, 차별하며, 진화에 이롭지 못한 약자를 배척하는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진화적으로 덜 익숙한 것(유전자를 전혀 공유하지 않은 타인에게 관심이 있으며, 약자를 위한 복지에 관심이 있는 ‘자연스럽지 않음’)을 행하는 대표적인 직종이 ‘의사’라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 사람을 위하는 것은 의사 협회의 몇몇 사람들이 주창하는 것처럼 ‘치킨을 파는 것’이나 ‘기계를 수리하는 것’과는 다르다. 즉, 유기적인 인간, 인간 사회를 위해 사회적 영역까지 치료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는 신성한 직업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히려 사회의 지도층으로서, 현명한 학자, 지식인 엘리트 그룹으로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면허를 가진 사람으로서 오히려 사회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사회 운동가들 보다 넓다. 
     
중립과 방관은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다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힘든 일이다. 안정된 삶일수록 보수적이기 쉽다. 타인의 고통과 불안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방관하는 것과 중립을 지키는 것이 이것 자체로 능동적인 ‘폭력’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희생자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마치 1930년대에 독성이 있던 ‘레이온’을 생산하는 기계가 위험에 대한 경고 없이 1960년대에 한국으로, 1990년대에 중국으로 향했던 사례처럼 말이다. 1960년대에는 가난한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피해를 봤지만, 이제는 우리의 방관과 무관심 속에 다시 중국인 하층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는 것처럼 말이다. 
     
  행동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사회 현안에서 지금처럼 체면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고, 우리의 권리를 조금 양보하고, 환자의 건강을 생각하는 시스템에 대해 고민하자는 것이다. 의사 사회에서 정치적인 선택은 상당히 제한되어왔고, 의사집단은 우리들만을 위한 이기주의, 황금만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였는데, 좀 그러지 말자는 이야기다!
     
  진심으로, 나부터도 타성과 쾌락에 젖어 좁은 사고의 폭에서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정말 ‘생각’이란 것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풍요로운 삶은 물론 인간에게 중요하지만 그것을 ‘인간다움’, ‘의사다움’과 바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번 사는 인생 아니던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책임을 진다. 쾌락과 자신의 안위, 안정된 삶을 사는 것 또한 선택이다. 그것을 비판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내 인생에서 무엇이 남을지, 내 삶에서 의미 있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지 고민 해볼 수는 있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저렇게 약자의 편을 들 수 있었을까? 나는 사소한 것이라도 약자의 편을 들었던가? 다른 이의 진심을 공감 했던가?
     
왜 이런 일을 하나요?
     
  굳이 우리가 사회적으로 나서야 하나, 어떻게 나서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든다면, 책에서 당시 반도체 제조 기업이던  IBM에서 일하다 암에 걸린 노동자들을 위해 싸우는 클랩 교수의 인터뷰를 되새겨볼 만하다.
"인터뷰어: 왜 이런 일을 하나요? 돈 때문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클랩 교수: 골리앗에 맞서는 것이지요. 법정에서 노동자들은 보통 이길 수 없습니다.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어떤 변호사는, 어떤 학자는 그의 편에 서있어야 합니다.” (p108)
     
  모든 의사가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 혁명가가 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감기약을 내주시는 동네 원장님, 내 다리를 수술해주셨던 정형외과의 응급실 선생님,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성형외과 의사 그 분들 한 분 한 분도 의미 있고 훌륭한 소시민이다. 이들을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다만, ‘어떤 의사’는 ‘그들의 편’에 서있어야 하지 않을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 는 20세기 미국 민중 철학자이자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하워드 진; Howard Zinn (August 24, 1922 – January 27, 2010)’이 즐겨 쓰던 격언이자, 그의 자서전의 제목이다. 역동적인 사태, 사회 속에서 바람직하지 않거나 불가능한 기계적 중립을 지킨다면 그것은 현재의 방향에 동참하겠다는 판단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빗대어 우리 의료계 일원들과 미래의 의사가 될 나에게 말하고 싶다. “히포크라테스의 지팡이 위에 중립은 없다.”

본문 끝(3페이지)
     
*사족 하나. 사회적 불평등, 사회적 아픔을 기록한 많은 책들이 있다. 내가 읽은 책으로 국한하자면 쿠바의 의료를 설명하며 의사의 사회적 책무를 자극하는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Revolutionary Doctors) 이라던가, 세월호 사태의 <금요일엔 돌아오렴> 같은 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책들 중 이 책이 특별한 것은 ‘과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사회적 문제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도에게 있어서 객관적이지 않은 증거, 다수의 감성에만 호소하는 글은 사이비 종교와 다를 것이 없지만, 이 책은 감정을 호소하는 글이라기보다는 냉철한 학자의 300페이지짜리 논문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 책이 내게는 더 설득력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저자가 전문적이고 어려운 자료들을 우리 같은 대중들도 이해하기 쉽게 쓰기 위해 노력한 것도 진심으로 상찬한다.
     
*사족 둘. 이 책을 통해 본인의 글쓰기에 대한 두 가지 반성이 들었던 것 같다. 내 주장을 하기 위해서 적절한 증거와 객관적인 증거를 사용했는가, 그 증거들이 내 편견에 의해 왜곡되지는 않았었는가, 과학자로서 과학적 방법론, 논리적 합리성을 가진 글이었는가가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어려운 문장과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던가 하는 성찰이다. 결국 말과 글의 목적은 설득이고, 그 설득을 위해서는 쉬운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데, 내 글이 혹여 오만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글쓰기는 아니었던가.
     
참고문헌
[1]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2017
[2]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2013
[3] Revolutionary Doctors, Steve Brouwer, 2011
[4] World Hunger Explained to my Son, Jean Ziegler, 1999
[5] 어떻게 살 것인가, 크라잉넛, 2010
[6] 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 Howard Zinn, 1994
[7] 금요일엔 돌아오렴,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2015
[8] 지능의 사생활, 가나자와 사토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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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영경

2018.06.11 00:16:52
*.56.116.249

잘 읽었습니다.


몇 문장들을 곱씹어봅니다.

‘방관하는 것과 중립을 지키는 것이 이것 자체로 능동적인 ‘폭력’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희생자는 우리가 될 수 있다.‘

‘“클랩 교수: 골리앗에 맞서는 것이지요. 법정에서 노동자들은 보통 이길 수 없습니다.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어떤 변호사는, 어떤 학자는 그의 편에 서있어야 합니다.” (p108)’


교육 역시 다르지 않다 생각합니다.

어차피 각자가 옳다고 믿거나 옳기를 바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교육은 결코 중립적일 수가 없는.

자주하는 표현입니다만, 결국 어떤 세계관이 승리하느냐의 문제이고 마는.


결국 자기가 믿는 바대로,

그런데 그 믿음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또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여야겠지요,

살아갈 수 있느냐가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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