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기도 했고 바람이 불기도 했으며,

봄비 내리고 개구리가 울기도 했고,

다시 눈 날리고 비 내리고 그리고 맑은 보름이었다.

명상집중센터로서의 ‘사이집’에서 집중수행 보름의 여정이 있었다.

공간 길들이기, 그런 의미쯤이었겠다.

먹는 것 또한 최소화해서.

때로 각자 일하고 더러 밖에서 함께 일하고,

빵을 굽고 차를 달이고,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혹은 각자 자신의 흐름대로 수행하고.


첫날 잠자리로 쓸 다락방이 시선에서 노출돼 있어

낮은 커튼 하나 달다.

20년 전에 만들어 간장집 복도 현관에 걸었던 걸 빨아 놓았던 참.

더 이상 잠자기 위해 쓰는 간장집은 아니었다.

남쪽 볕에 노출되어 있던 천은 색이 바랬기도 하고 너무 낡아 삭은 부분도 있었다.

쓸 만한 부분만을 싹뚝 잘라 재봉질로 조금 손질하니 맞춤했다.

사이집 욕실벽이며 부엌벽 타일에 걸레질을 하며

비로소 공사 흔적을 보내기도.


5일은 봄학기 시작하던 날.

원고 하나를 마감하며 날밤을 새고

새 학년도 새 학기를 보일러 누수가 있었던 햇발동을 수습하러 사람을 맞으며 맞다.

(날마다 기적인 물꼬의 삶,

2월 어른의 학교를 마치고 사람들이 떠나자마자 햇발동 현관에 물이 흥건하였더랬다.

새는 곳이 수도일까, 보일러일까,

닦아내며 원인을 살핀 며칠이었더랬다.)

원인을 찾아가는 중에 학교 공간이며 달골 기숙사며 몇 곳의 보수하며 보내기도.

창고동의 물이 새던 수전을 두 곳 바꾸고,

학교 교실 출입문들이 원활하게 여덟 곳 레일을 교체하고,

11일 빨래방이며 가마솥방 복도며 몇 곳의 전선을 안전하게 정리하거나 바꾸거나.

드디어 책방 앞 외등도 달았다. 평상에서 한밤에 모여 앉기 좋겠네.

그거 하나 달리는 데 십 년이 걸렸나...

햇발동 방충망 손질이라든지 손이 더 있어서 수월할 수 있는 잔손들도 보다.

대개 그런 노동을 하는 보름이었다.


새로운 날은 지나간 시간을 정리하는 것이 출발일 것이다.

새로운 한 시절을 맞을 준비였던 셈.

달골 컨테이너 창고를 정리하다.

그곳에는 사이집을 정리하는 동안 나온 공사 관련 물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창고라는 쓰임대로 언젠가 쓰이려고 혹은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해 들어있던 물건들.

입학과 졸업이 있던 상설과정 초기 몇 해 짓던 포도농사에 쓰였던 상자들도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어이 다 끌어냈다. 물건을 정리하는 것은 과거의 그 시간을 정리하는 것.

사이집에 문제가 되었던

물이 차는 전선배관함도 해결하고 얼어터지는 수도계량기에 공기층을 만들고 채우고,

어느 반나절은 밖으로 나가 자잘한 살림살이 몇 들여오기도.


책방에서 벽책장 아래 사물함에 20년 가까이 갇혀있던 책들이 나와 바닥에 쌓여 있던 것도

그예 치웠네.

역시 지나간 시간에 대한 정리들이다.

3분의 2는 버려지는 쪽이었다.

사상계 몇 권과 문학사상지는 남겨 사이집 누마루 쪽 책장에 올리니 딱 제자리.

사물도 사람도 제자리들이 있는.

10대 말과 20대 초반 청계천을 돌며

문학사상 1호부터 100호까지 채우던 시절이 있었다.

내 젊은 날의 역사 한 귀퉁이는 그렇게 자리를 틀었다.

버리는 것만 또 최선은 아닐 테지.


바느질도 했다.

면을 꺼내 빨고 삶고 말리기를 여러 차례 하는 정련의 과정 뒤 마름질.

사이집에 쓸 몇 장의 커튼이 될 것이다.

아침뜨樂의 밥못 위 물고기 모양의 입부분에 개나리도 다시 삽주하다.

열심히 했던 일도 더러 실패를 반복한다.

재작년 꺾꽂이에 살아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10일 비 내린 뒤 11일 심고 그 오후 다시 비가 내려주었다.

이것들도 고사한다면, 다시 또 심으리.

이웃 절집에서 벽돌을 얻어와 사이집 바깥수돗가를 만들 준비도 하다.


밤들에 세 편의 영화도 동행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니노(Gran Torino)를 여러 해 전 보고 다시 보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외골수 노인이 그의 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고 했던,

옆집으로 이사 온 베트남 소수민족 몽족 이민자 소년을 지켜낸 이야기.

어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다.

어른은... 그렇게 아이들을 지켜내는 존재여야 한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굳건히 자신의 영역에서 힘을 쌓는 것도 멋진 어른이다.

배우 또 감독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가 또한 좋은 어른이지 않은지.

또 한 편은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시나리오가 특히 돋보였던. 그래서 연기도 더 빛났을.

죽어가며 강간당한 딸의 사건에 범인은 오리무중이고 사건은 잊혀져가자

엄마는 마을 외곽 세 개의 광고판에 질문을 던지고,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영화를 구성한다.

적대적이던 경찰관과 엄마가 범인을 응징하러 가는 마지막 장면,

그 길은 두 사람 각자가 행했던 죄의 속죄 위에 있고, 결말은 모른다.

"정말 죽일 거야?"(?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음)

"그건 우리가 가는 길에 결정할 수 있겠지!(I guess we can decide on the way)."

우리 삶처럼 말이다.

많은 일들은 결정하고 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며 결정하는 것일 터.

두 영화는 복수극? 아니다. 연대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결함이 지닌 개인들이지만 응징의 자격이 가능하다는.

마지막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첫 장편 <환상의 빛>(1995).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집 속 단편이 원작, 죽은 남편에게 보낸 독백체의 편지글.

3개월짜리 아들과 아내를 남겨놓고 철길 한가운데를 걸어가 버린 남편,

그 알 수 없는 자살이 남긴 상처, 가는 사람은 가고 남는 사람은 또 산다.

우리는 삶의 이유를 다 알 수가 없다.

그는 그의 업을 지고 가는 것, 그게 남은 내 잘못은 아니다. 보내야지!

사람은 끊임없이 죽음을 딛고 죽음으로 걸어간다.

상실이지만 상실이 여사인 삶이고

삶이라지만 여사로 죽음과 맞물리는 삶.

일용할 양식을 주는 바다이면서 동시에 삶을 삼키는 바다,

우리를 실어 나르는 기차가 가는 길이면서 세상을 건네는 철길.

죽음은 삶 곁에 동행하고, 상실을 안은 사람들은 서로를 기대고 또 살아간다.

시아버지는 바다에 나갔던 젊은 날 손짓하던 환상의 빛을 견뎌내고 삶을 지속했다.

자살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 유혹 속으로 걸어간 일일 뿐이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인생에서 만나는 그 빛 속으로 누구는 가고 누구는 남는.

스스로 목숨을 놓은 이가 가까이 있지 않아도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영화였다.


I guess we can decide on the way,

이번 집중수행도 그러했네. 날이 가면서 움직임을 결정한.

마무리는 남도행이었다. 몇 분의 어머니를 만나는 일.

사람 노릇하기, 우리 사는 일이 그래야지 않나.

여든이 넘었거나 거기 이른 어르신들은

우리에게 삶을 넘기고 생의 마지막들을 맞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들처럼 그렇게 무심한 듯 생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

아들 내외가 먼 이국에 가고 홀로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도 있었다.

“선배가 저한테 잘한 거 생각하면 (어머니께) 더 자주 와야지요.”

“사람이 (서로)알면 그라는 기다.”

사람이 사람을 알게 되면 그렇게 하는 거라셨다.

나서는 우리들에게 외려 어머님이 차비하라 봉투를 내미셨다.

사람이 알면 그라는 거라는 말씀을 곱씹었다.

봉투 맞교환이었을세.


8일에는 인근 초등학교 교장샘이 지원(?)도 오셨다.

천혜향을 박스로 앞세우고 치즈케잌까지 챙겨.

아드님 생일 덕을 우리가 보았네.

맛난 것을 사며 이곳도 생각했다니 고마웠다.

물김치국수와 잔치국수를 냈다.

다른 날엔 함경도식 김칫국국수를 말아먹자고들 하였네.


최근 수년 중요한 시기마다 함께한 벗이 이번 집중수행에 동행했다.

6월 시잔치가 물꼬 연어의 날로 넘어가던 시기,

재작년 섣달 사이집의 막바지 작업들,

바르셀로나의 통증의 날들,

산티아고 가는 길에 건조하고 거칠고 지루하다는 중부평원지대 메세타인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의 200여 km,

그리고 지금 이 새 시절 앞에 같이 걸은 벗에 특별히 감사를 보낸다.

영영 사람 하나 보낸 쓸쓸한 자리를, 사람 없는 적막함을, 신산한 살림들을,

그대없이 어찌 이 봄날 이었으리. 늘 나를 존재케 하는 그대여!

큰 틀에 비로소 안을 채워가는 느낌의, 실제로도, 날들이었다,

매 순간을 따뜻하게 그리고 깊이 살았노니

명상이란 게 별거이겠는지.


18일 오늘까지 햇발동 누수는 수습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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