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 서정춘, ‘봄, 파르티잔’ 전문)



긴 길.

내포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진주로 내려와 산청으로 구례로 함양으로...

벽소령 칠선계곡 백무동 한신계곡, 지리산 둘레길 운리-덕산 구간, 금계-인월 구간.

숲길이 아니라 도시에서 걷는 길이었다면 강행군이 쉽지 않았을 게다.

산길이 사람에게 주는 회복의 힘으로,

혼자도 걸었지만 몇과, 또 서른도 넘는 이들과 어깨 겯고 걷는 이들로 가능했던 걸음!

지리산에 깃든 물꼬 식구들도 만난.


지리산, 그 이름에 가슴 저리지 않을 이는 흔치 않을 것. 난들.

한국을 떠나있을 때라면 다시 한국으로 바삐 돌아오게 하는,

내게 손가락에 꼽히는 까닭 하나도 바로 지리산.

지리산은 시인 서정춘 선생님의 단 세 줄로 된 시로도 다 그려지고

(단 세 줄! 시가 모름지기 어떠해야는지 보여 주시는)

이어 목이 멘다. 더 어떤 형언이 가능할 수 있을까.

걷는 내내 나는 1950년대 언저리를 살았다.

그리고 분단의 세월이 또한 새삼 미어지게 서러웠고,

짱돌과 화염병 뒹구는 거리에서 보낸 젊은 날을 생각했다.

지리산은 내게도 역사다.


저온샘 편-

까마득한 저편에서 소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운 소리는 꿈을 가르며 쑥 들어왔더라.

이른 아침이었다. 두어 시간 잤던가 보다.

어차피 먹통이 된 손화기도 수리점 문이 열려야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늦은 아침을 계획하며 느긋하게 든 잠자리였다.

그런데 시인 문저온 선수.

진주의 벗이고 물꼬 학부모이고 논두렁, 그리고 우리들의 훌륭한 사회자.

간밤에 헤어지기 전 전화가 먹통,

그 사이 그는 수리점을 찾고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넣고 문 열 때 맞춰 데리러 왔다.

사람이 어디까지 정성스러울 수 있는 것인가.

“물꼬에서 배웠어요!”

겸손까지 정성스러운 그다.


제원샘 편-

젊은 시절 한국의 한 공동체에 들어가 살다

가족을 이뤄 인도 오로빌 공동체에 살다

다시 고향이 있는 지리산으로 홀로 돌아온.

서로 못다한 이야기가 많으나 안 해도 되는(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삶의 접점이 많았으나 더는 할 말이 없는?

설렁설렁해진 삶을 서로 잘 볼 수 있는.

마침 인도에 와있던 딸이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을 같이 걸었다.


평준샘 편-

산오름 훈련을 몇 개월 같이한 갑장.

고등학교 동창과 결혼해서 모든 동창들의 집합소가 된 그네의 집.

대기업에서 일하다 지리산으로 든 지 몇 해.

갑장이라고 늦으면 늦는 대로 이러저러 챙겨주는 이.

지리산 여기서 저기로 움직일 때 운전병이 되어도 주고 같이도 걷고

재워도 주고 멕여도 주고.


두규샘 편-

전남의 고교 국어교사였고,

지금 지리산 실상사 가까이 들어 활동하는 가객.

시인이지만 가수라고 불러야 더 옳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게 일고여덟 해는 되었을 순천에서의 만남.

지리산을 도는 내내 그의 글을 만나거나 그를 아는 이들을 만나거나.

세월호 걷기를 마치고 회향하는 날,

서로 비껴가 만나지는 못했으나 반가이 통화.


유설샘 미루샘 소울 소윤 소미편-

물꼬의 오랜 식구들.

젊은 날 물꼬에서 보냈고,

그들의 주례를 섰고,

소울이가 왔고, 소윤이가 왔고, 그리고 소미가 와서 다섯 식구를 만들어

2년 계획으로 서울을 떠나 장항마을에서 한 해를 보내고

지금은 우람한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는 황치길에 살다.

그들과 있으면 너무 즐거워 늘 헤어지는 게 아쉽지 않았던 때가 없는.

얼마 전 물꼬의 ‘연어의 날’에도 만났는데 반나절을 같이 잘 놀았다.

신혼부터 오라오라 불러도 못 가던 걸음이더니

지리산에 이르러서야 갔네.


희기샘 상대샘 용규샘 도익샘 정임샘 정은샘 그리고 박무열샘 편-

산을 사랑하고 산을 지키는 사람들.

숲을 아끼고 숲을 가꾸는 사람들.

실제 지리산 둘레길을 다 만들었다는 지리산 고무신 박무열샘의 전설도 들었다.

벗들의 집에도 예취기를 들고 나타나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곳 밭의 잡초도 그의 손이 다 닿는 이.

‘찐하게 노셨더만유. 일상 복귀 잘 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지리산은 산을 타고 소문도 빨라

아침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진 활극을 지리산 벗들이 다 알던.


그리고, 정규샘 편-

발해 시대의 뗏목을 재현해 발해 항로를 따라 떠났던 ‘발해 1300호’가 있었다.

그 배에 올랐던 넷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지만

대신 산 자들을 이어주었다.

정규샘은 형(현규샘)을 보냈고,

그 인연으로 배가 난파된 뒤 우리들은 만났다. 벌써 20년 전이다.

정규샘은 구례에서 유기농 쌀을 생산하고 있다, 130마지기 논에서.

쌀로 다른 농산물들을 바꿔먹기도 한다더라.

집에서 수진샘이 차려준 꽃밭 같은 밥상을 받았다.

사람 찾아오면 밖에서 대접하기 쉬운 요새 삶인 걸.

막둥이 서완이랑 숨바꼭질도 하고 놀았다.

돌아오는 길, 바리바리 싸 준 먹을거리들을 실으며(아주 이삿짐)

눈시울이 다 붉어지더라. 동기애(同氣愛)!


지리산 언저리에서 돌아오는 길, 하룻밤이 걸렸다.

자다 깨다 쉬다 일하다 다시 운전대를 잡고 엉금엉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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