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대서 눈 될까 긴장했던 밤.

여느 해 같으면 11월 15일부터 달골 공간들을 정리한다.

30일까지 머물긴 하지만 언제고 눈이 오면 후퇴해야 하는 전장처럼 준비하고 지내는.

그런데 이 겨울은 그때까지 집짓기 현장이 돌아가야 하는.

일한 날 수 20일이면 시공을 끝낼 수 있다는 기술자였다.

10월 21일 터를 팠는데,

자꾸 그 기간이 어림도 없을 것 같은 예감...

뭐... 어쨌든... 하늘은 맑았다.

현장에서는 지붕재 징크를 잘랐다.

집짓기 우두머리샘은 내일 또 하루를 쉬어간단다, 일이 생겼다고.

그러면 모든 작업자들이 같이 또 쉬게 되는.

자신이 없어도 일할 수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도록 현장을 만들어줄 수도 있으련만...

그참... 애는 타는데...

오늘은 저녁 설거지를 일찍 끝내고 달골 올라

보일러실 심야전기 내려간 차단기 하나를 바꾸었다.

산골 살면 이런 것쯤 사람 부를 일 없이 하고 살아야 한다.


문학소녀이지 않은 사람 드물지.

어릴 때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다.

그런 소리는 공부까지 좀 해주면 더 그럴 듯해진다.

반공글짓기, 과학글짓기, 위문편지, 졸업식 송사와 답사, 학예글짓기, 독후감쓰기,

그 많은 숙제들을 건넜던 시절의 상장 몇 개면 자신까지도 착각하는.

그 글이 가진 목적성을 잊고 그런 결과물들이 마치 글 잘 쓰는 사람인 양했던.

글 좀 쓴다는 아이가 있으면 자신도 타인들도 당연 진로가 국문과였고,

졸업하면 글 쓰는 직업을 가지는 줄 알았다.

아름다운 글을 읽으면 아름다운 글이 쓰고 싶었다.

힘이 나는 글을 읽으면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감동이 일면 나도 마음을 순순하게 해주는 글로 좋은 세상에 복무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책을 그리 읽었냐, 그렇지도 않다.

그렇다고 글을 바지런히 썼냐, 그것도 아니다.

그저 되고 싶었을 뿐이다. 허영 같은 거.

세월은 흘렀고, 나이를 더했고,

문득 어느 길모퉁이 돌아서서 마주치는 뜻밖의 풍경처럼

어린 날이 떠오를 때가 있다.

가까운 시간보다 먼 시간이 더 많이 차오르는 나이가 된 거다.

최근, 글쓰기를 꿈꾸게 한 건

여태 가지고 있던 기억과는 다른 뜻밖의 지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가에서 유년을 보냈다.

외할머니는 마을 할머니들의 맡언니 격이었고,

새벽이면 잠이 일찍 깬 할머니들이 마실을 와 도란거렸다.

할머니들이 나누는 당신들의 어릴 적에서부터 고모 사돈 이웃들의 이야기,

잠결에 그건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설화 속 이야기로 들렸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거다.

물꼬에서 사는 일은 눈을 떠서부터 자리에 누울 때까지

몸의 움직임을 더 많이 요구하는 삶,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거 없이

그저 세상 끝 날까지 지극하게 살다가는 소망이 전부,

그런데, 가끔은 잊었던 사람처럼 산마을의 새벽빛 아래

원고지가 내 앞으로 와 있고는 한다, 딱 오늘 새벽처럼.

하지만 오늘도 칸을 채우지는 못했다.

새벽을 밀고 밥 하러 갔다...


내일 올해 마지막 암벽등반 일정이 있다. 좀 늦어졌다.

이번학년도는 주말마다 1박2일 산오름이 자주였다. 긴 여정이었다.

함께 가기 위해 산우가 한 명 와서 묵는다.

일 많은 이곳에 그리라도 산 보탠다고 차로 실어가마 해주었다. 이른 아침 나설 것.

마침 집짓는 현장도 하루 쉬게 된 게 다행하다 해야 하나.

아니었으면 때마다 밥을 먹게 하기 위해 꾸려두고 갈 일이 또 여럿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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