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꽃을 키울 때는 볕도 중하지만 바람이야말로 참으로 종요로운 요소라고

긴 세월 꽃을 키운 벗의 어머니가 말씀하셨더랬다.

사물 사이도 그렇고 사람 사이도 그렇다.

어쩌면 나와 내 사이도 다르지 않다.

일정한 사이 사이로 바람이 도는 일,

거기 숨결이 지나고 사람이 운신을 하고 곰팡이는 달아난다.

사람이 머물지 않던 자리에 있었던 집 안 화분에는

아직 목숨 붙은 것들이 마지막 숨을 끌어안고 있었다.

달골 햇발동 문을 열었고, 바람이 닿았다.

2018년 1월 1일 올랐던 인천발 바르셀로나행에서

2019년 정초, 예정보다 좀 늦게 돌아왔다.


가마솥방에서 밥을 하며

달골에서 차를 달이며

달골 마당에서 개나리와 찔레나무 가지를 치며

아침뜨樂에서 마른풀을 걷어내며

못다 짓고 떠났던 새집에서 걸레질을 하며

한국에 왔구나, 대해리에 돌아왔구나 했다.

"너 오기 전에 물꼬 가서 청소 좀 하려고..."

세상에! 어느 누구 그리할 마음을 내려나,

물꼬의 낡고 너르고 구멍 숭숭한 살림, 그것도 겨울 대해리에 들어와 맞이 청소를 한다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벗이며 물꼬를 건사해온 이들로 또 돌아올 수 있었다.

아리샘이며 희중샘이며 부어도 금 간 항아리 같은 물꼬 살림을 살아냈고,

주욱샘이며 무산샘이며 학교와 달골의 풀들을 벴고,

주훈샘이며 남도의 어르신들이며 밖에서 먹을 것들을 들여 주었고,

아들도 드나들며 어미의 삶을 뒤치다꺼리 해주었다.

또한 물꼬 살림이 가능하게 한 논두렁 분들이 계셨고,

낮이고 밤이고 학교를 지켰던 학교아저씨도 있었다.

기락샘이 언제나처럼 물꼬 살림의 가장 큰 몫을 맡았더랬다.

오랜 병상을 털고 일어나 산마을로 다시 돌아올 힘이 그들로 생겼을 것이다,

허리가 아주 굵어졌고 머리는 반백이 되었으며 걸음은 느려졌으나.

오직 물꼬의 연들이 아주 먼 곳에서도 번번이 한국으로 나를 데려오고야 마나니.


기표샘이며 윤실샘이며 물꼬 바깥식구들과 어르신들의 연락이 기다리고 있었고,

마을 젊은(시골의 젊은이는 예순 나이라는!) 엄마들도 안부를 물어주었다.

군대에서도 학교에서도 서울에서도 지방에서도 안부를 물어왔다.

엊그제까지 메일이 오가던 이에서부터 십 수 년 전의 인연이 불현듯 보낸 글월도 있었다.

잊히지 않아 고맙다.

2018년의 지독했던 여름과 겨울을 들었다.

내가 피해갔던 게 혹독한 날씨였던가 고마웠다.

시베리아 벌 같은 대해리로 들어서는 겨울 걸음이 살얼음 위인 양 하였더니

수월한 기온이었다.

이 역시 살아라, 살아라는 뜻인가 감사했다.

묵었던 먼지를 털고

천천히 책을 읽고 걷고 물꼬의 여러 식구들과 소식을 나누었다.

무산샘과 장순샘이 들어와 그간의 일들을 전했고,

민수샘이 당장 달려와 새집의 누마루 아래 통나무 기둥 셋을 세워주었다.

화분 몇에서 다시 일어서는 생명들이 있었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어이 지냈냐고들 물었다.

일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며 한 해가 흘러갔다.

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죽도록 경험하는 사람살이가

공간을 이동해서인들 얼마나 달랐으려고.

그래도 닥친 상황에서 어떻게든 길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은

순전히 물꼬를 통해 배웠을 것이다.

오랜 병상을 지키며 지내는 곳에서의 살림이 궁핍하긴 하였으나

불편할지언정 존재를 위협받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건너와 준 벗이 살림을 살아주기도 하고,

곁에서 식구가 돌봐주기도 하였다.

기대고 살 사람이 있어 기뻤다.

자신이 누구를 보호하기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반성도 하며 지냈다.

교육 프로젝트에 합류하는 애초의 계획은 틀어졌지만

글을 쓰거나 길을 안내하거나 영어를 가르치거나 하는 자잘한 일들로

멀리서 작으나마 물꼬 살림도 보탰다.

눈이 급속도로 나빠져 글을 겨우 읽고 지냈지만

자녀교육서와 트레킹기, 두 권의 초고도 마쳤다.

오늘은 대전역에 다녀왔다.

지난주 나무날도 같은 시간에 대전역에 있었다.

탈고한 책 두 권의 출판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더랬다.

(자녀교육서는 출판사가 바뀌면서 지난 연말 내겠다던 계획이 바뀌었다)

나 역시 책 내기 붐에 일조하는가.

출간의 문턱이 낮아진 것은 반가운 일이나

저자는 널렸는데 작가는 드물다는 편집장의 말을 들었다.

세상은 달라진 가치관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여전히 옛 가치가 좋으니 역시 '옛날사람'이다.


새해가 되면 그 해에 방향타로 삼을 어절이나 문장을 수첩 들머리에 적어둔다.

올해는 ‘오늘은 죽기 좋은 날’이라 썼다.

오늘은 죽기 좋은 날, 그러하니 살기도 좋은 날!

생이 처음이었듯 죽음도 우리에게 처음,

해왔던 자리에서 삶을 마감할 밖에,

그러니 순간을 열심히 살 밖에.


물꼬의 고마운 인연들에 깊이 깊이 머리 숙인다.

거듭 고맙고 또한 고마운 삶이라.

낼 모레 설,

부디 모다 마음 좋은 또 한 해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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