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 쉬었던 비는 다시 창대비로 내렸다.

이른 아침 아침뜨락에 들어 넘치는 밥못의 물을 빼주고

물이 빠지는 동안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꽃잔디 사이 풀을 뽑았다.

꽃잔디가 웬만큼 힘을 받으면 줄기들이 잘 엉켜 풀이 날 틈이 여간해선 없거늘

지치지도 않는 산 아래 밭이라.

풀섶의 벌집을 봐두었다가 오늘 비 온 틈에 떼어 내기도.

날개가 젖으면 날기 힘든 벌들이라.

그 참에 보이는 거미줄도 걷어낸다. 치고 나면 또 어느새 쳐있지만.

떨어지는 감잎을 쓰는 일이 학교아저씨의 이즈음 아침저녁 일거리 하나.

잎이 크니까.

교문이며 우천매트 위며 쓰신다.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않았던이에 대한 인터뷰 글 하나를 읽었다.

대상자에 대한 매력으로 시작한 읽기였고,

글쓴이의 매력으로 다른 글들도 읽게 돼 그 글에까지 이르렀다.

'그'를 길들인 게 있다면 가난과 밥벌이였다고.

그는 긴장하는 법이 없다고.

긴장이란 남의 시선을 의식할 때 생기니까.

남의 우리 안에 들어와서도 자기의 홀로 싸우는 사람,

혼자 놀 때 깨가 쏟아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어느 대학 강연에서 말했다.

나는 쫓겨나고 제외되고 고립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요.

누가 나를 욕한다고 해서 고유한 내 자신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도 아니에요.

반대로 내 편이 많다고 해서 아늑함을 느끼거나 든든함을 느끼지도 않아요.”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서서 무리 짓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일처럼 보이는 그였다.

그래서 언어에 집착하는 나머지 사회의식이 박약한 거 아니냐는 비판을 받던.

김훈의 대답은 이러했다.

사회의식? 그 무슨 말라빠진 사회의식입니까? 돈 많은 사람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주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뜯어내는 것이 나은 겁니다. 저는 인간의 바탕은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주장되고 있는 모든 가치가 개별적 존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공허한 것입니다.

그런 그가 세월호 희생자 앞에서, 공사현장에서 숨진 일용직 노동자들을 위해 통곡했다.

생명안전시민넷이라는 시민단체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라고.

청년들 일하는데 이름만 빌려준 거라지만 움직이기도 하는 그다.

사람 참 안 변한다.

이렇게 말할 땐 대체로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져 나온 성정을 말함일 것.

그러나 또 변하는 게 사람이라.

그럴 땐 대개 어떤 계기가 있을.

그저 글로 읽던 그를 이제 그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간다.

나이 들수록 해야 할 말, 해야 할 일에 대해 그가 생각하게 한다.

죽지 않고 살다보면 어느새 나이든 사람이 될 테고,

처신을 생각해야 할 때.

젊은 날 깃발을 들고 나섰던 날들이 있었다.

깃발은, 어쩌면 나이 들어서 들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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