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4.불날. 흐림

조회 수 397 추천 수 0 2020.08.13 04:28:47


 

낮밥을 물린 뒤 학교 뒤란 아랫길에서 이장님과 면담이 있었다.

학교 뒤란이 우거져 뒷마을로 이어진 길이 불편하니

나무를 좀 베 내겠다는 건의를 받았더랬다.

지난주 통화하기를, 나무를 베기 전 물꼬에 알리고 범위를 조율키로 했는데,

오늘 아침 벌써 사람들이 베고 있다고 전화가 들어왔고,

이장님께 당장 멈추라 했다.

오늘 얼굴보고 얘기키로.

북쪽은 뒤란 언덕 중간쯤 더러더러 있는 돌담을 경계로

아래쪽 나무들을 베기로 했고,

서쪽은 잔가지들만 치기로,

그리고 굵은 것들은 물꼬에서 땔감으로 쓰기로 했다.

두시면 저희가 실어갈게요.”

준한샘과 학교아저씨가 같이 나갔다. 든든하더라.
큰 도로에서 달골 들어서는 길 얼마쯤 가서

수로가 막혀 넘친 물로 겨울에 오가기가 위험한데...”

그 건도 살펴봐 주기로 하시었네.

드디어 매미도 운다, 한여름이다.

날이 쨍해서 좋으나 이곳저곳 풀숲을 건드려놓은 탓에

모기들이 마구 달겨들었다, 말을 나눌 수 없을 만치.

 

달골에서는 하얀샘이 옴자 둘레를 기계로 풀을 베고,

학교에서는 학교아저씨가 예취기로 마당을 베고,

안에서는 몇 가지 자잘한 일들부터 챙기다.

삶고 빨고 풀먹이고 다림질한 것들 제자리 찾기.

다건이며 다포며 차 관련 것들은 찻바구니나 찻자리에,

상자로 만든 액자에 걸었던 자수 천은 다시 거기,

촛불 자리에 책같이 펼쳐두었던 액자에도 두 장의 자수 천을 다시 붙였다.

복도 끝 교무실에 이르는 안내판도 다시 쓰다.

오래전 계자 때 샘들이 써둔 것.

낡기도 했고, 볼 때마다 문구가 좀 걸렸다.

이곳은 어른 일터. 아이들은 들어오지 않아요.’

여기는 그대의 발길을 돌리는 곳.’

붙어져 있던 것을 떼고 오랜 먼지를 털고 다시 붙이다.

그대의 발길을 돌리는 곳. 여기는 어른 일터라고만 썼다.

 

오후 서너 시간은 부엌 살피기.

! 곰팡이들이 점거한 공간이었다.

주말마다 물꼬 일정을 꾸렸다고는 하지만

이번 학기 제도학교를 가 있는 동안 소홀했던 곳도 있고,

오랜 먼지도 있고.

이번에는 계자준비 차례를 좀 바꾸어보기로 한다.

늘 부엌은 가장 마지막 일이었다, 장보기와 같이 엮어.

그러다보니 속도를 내느라 힘을 박박 주게 되니 퍽 힘들었다.

그래서 부엌부터(전부 다 한 번에 못하더라도) 청소를 좀 하고

교무실로 이동하기.

스토브 아래 양념바구니 셋을 씻고

그 안의 양념병 겉에도 두어 개씩 보이는 곰팡이를 닦는 데만도 긴 시간.

물기를 잘 닦지 않은 곳이라면 눈에 띄지 않아도 어디고 곰팡이가 앉았을 수 있겠기에

접시들도 꺼내 뜨거운 물을 끼얹고 닦고.

접시 세워두는 철제 선반도 칸칸이 닦아내고.

2003년부터 지금도 거기 서 있는.

그 전 10여년 내 자취살림에 동행하기도 했던.

, 그러면 자그마치 30년이 다 돼 가는 건가...

땀이 비 오듯 해서 안경을 벗고 해야 했다.

자주 땀을 닦아야 했으니까.

가마솥방에만 있는 선풍기, 그것도 소용없었다.

모기 물린 곳은 여기저기 가렵고, 땀은 범벅이고,

해우소를 다녀오다 생각했다,

이곳이 너무 열악해서 우리 아이들이고 샘들이고 얼마나 힘이 들었을 거나.

그저 놓여진 거친 환경에서

다만 우리가 사는 거다, 살 만하다여기고만 살아왔던가 보다.

냉장고도 들여다보지 못하고,

선반만도 절반은 남았는데,

 

아쿠, 사람들 밥 멕어야지.

오늘은 어둠에 밀려서야 밥상에 앉는 일은 않기로.

모두 19:30에는 모이기로 했더랬다.

밥상을 차리고 상을 물리고 달골에 드니 9.

, 젖기 전에 태워버릴 종이류가 있었다.

소각장에 가서 태우는 동안

마침 곁에 있는 잔디밭의 강아지풀들이 보이네.

잔디가 채 자리를 채우기 전 그것들이 먼저 찾아든 공간.

다년생이 아니라 씨앗만 잘 따서 태워도 내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똑똑 씨앗을 따며 종이 쓰레기가 다 타기를 기다리다.

소각로 안에서 마르라고(그럼 태우기도 좋지) 씨앗을 넣어두고 뚜껑을 덮다.

 

계자 준비위 샘들이 나무날에나 들어온다.

그제야 글집과 여행자보험을 챙기자면 빠듯하다.

하다샘이 밖에서 미리 명단은 작성하고 보험 건은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로.

166계자 밥바라지 1호기 정환샘은 쇠날 저녁부터 들어온다 했다.

먼 길 초보 운전자라 얼마나 고단할 거나.

그래도 온다는 그의 소식에 어찌나 마음이 턱 하니 놓이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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