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뮤리엘 루카이저의 시 케테 콜비츠에서

 

그 시절엔 왜 그리 아버지들이 엄마를 때렸던지(혹은 아이들을).

못 배운 아버지들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

시절이 그랬다.

성폭행을 당하면 여자들은

숨거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하거나 

감나무에 목을 매달거나 농약을 마시거나 유곽으로 가거나 팔리듯 결혼하거나 했다.

1960년대생인 나는 그런 일들이 흔하게 일어났던 세월을 살았다.

그리고 2020년대에 아직 운 좋게 살아 있다,

아이들에게, 타인의 불편한 스킨십에 대해 싫어요’‘하지 마세요를 말할 수 있도록 가르치면서.

 

성평등으로서 또는 저항으로서 혹은 비폭력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지지했지만

한국에서 최근 몇 해 벌어진 페미니스트 진영의 남성혐오에 진저리를 쳐왔다.

남성들과(폭력이라든지 가부장문화라든지가 아니라) 싸우기 위해 모여드는 걸로 보였고,

여성집회에서 나온 사회적 보편규범을 넘어서는 몇의 퍼포먼스는 낯 뜨거웠다.

그것은 더한 '혐오'를 부르고, 사회를 갈라쳐 이득을 보는 정치 세력에 마냥 이용 당했다.

일찍이 나는 페미니스트들과 선을 그었고, 페미니즘 1세대들에 대한 큰 반감도 가지고 있었다.

진영을 불릴(키울) 생각만 한 게 아니냐,

선배로서 균형적인 시각과 목소리를 지닐 수 있도록 작용해야지 않냐,

학계 안으로만 들어가 있던 페미니즘의 건강성과 진보성을

실천의 장으로 잘 끌어낼 좋은 지점을 일부러 외면한 건 아니었냐, 그런.

학식이 뛰어나고 교육수준이 높고

대개 경제적으로 윤택한 이들이 접하는 특권층의 담론으로 페미니즘을 오해한 측면도 있었다, (실제 그런 역사도 있었으니까!)

가까운 청년들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 역시 거리를 두고 보고 있었다.

타인의 낮은 성인지감수성은 지적하지만

대개의 경우 정작 자신의 연애사에 혹은 그의 삶에 등장하는 남성과의(혹은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그 역시 페미니스트이지 못했다.

 

페미니즘 에세이를 하나 읽었다.

읽으려고 쌓은 책이 많은 시기라 서문이나 읽고 두어 꼭지 훑어야지 했는데,

마지막 문장까지 읽었다.

잘 읽혔고 공감했고 동감이 일어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게 일어난 일들을 반추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일상에서 내가 만났던 강간문화 같은 거.

[어쩌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친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개인의 경험을 지금 글로 옮길 수 있게 하는 힘이 아닐지.

그것이 (건강한)페미니즘이 이 사회에서 일궈낸 힘이기도 할.

더하여 용기 있게 말하고 싸워준 미투;Me Too Movement'의 주인공들이 내게 준 용기이기도.]

친인척 관계 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벌어졌던 일이 있었다.

사과 받지도 못했는데 그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를 외면하는 것으로 피했고, 그의 죽음 이후엔 기억에서 공소시효없음이 되었다.

또 어떤 경우는 가해자를 경멸하고 역시 만나지 않는 쪽을 택했다.

혁명을 부르짖던 이들 사이에서 함부로 대해졌던 경험도 있고,

노동운동권의 대부가 신촌의 뒷골목에서 성추행을 했던 적도 있었지만

내가 그럴 여지를 주었다는 생각으로 문제 삼지 못했다.

나는 친절했으니까,

대체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는 거리를 가진 부류의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다쳐서 노동운동권이 타격을 받을까 봐 그러기도 했다.

혁명을 말하기는 쉬워도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일상적인 폭력을 성찰하며 삶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음을

뼈저리게, 그것도 자주 보았다.

문학판이라는 곳에서 행해지던 성추행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남녀불문 그것을 문학을 하는 자의 특권인 양 착각하고 용인하는 세계,

나는 더 이상 그 동네를 가지 않았다.

그것이 밥벌이었다면 떠나지도 못하고 남았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그렇게 20년을 문학적인 글쓰기를 하지 않았다.(이건 꼭 그 이유만은 아니지만)

어떤 땐 제3자가 사건을 아는 경우도 있었다.

너는 이해할 것이라는, 남자 같이 아량 넓은 네가 이해해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일하는 곳이 내 문제제기로 시끄럽지 않기를,

내가 하는 일에 힘을 보탰던 이들의 선의가 훼손되지 않기를,

우리의 노력이 무의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도 참았던 일들이 있다.

권력관계에서 이뤄졌던, 편치 않았던 스킨십도 있었다.

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도와주겠다고 다가와 그 같은 짓을 한 경우

불이익을 당할까 봐 웃음으로 모른 척하기도 했다.

그가 무안할까 봐 그러기도 했고,

처음부터 제대로 정색하지 않았던 내 책임이 앞섰던 때도 있었다.

미처 성폭력이라고 깨닫기 전인 경우도 있었는데,

뒤늦게 굳이 문제 삼는 귀찮음보다 외면하는 쪽을 택했다.

(나는 제법 당당하고 당찬 여성이었고 어떤 사안에 대해 잘 싸우는 여성이었음에도.)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결혼이 고마웠다.

결혼했어요, 는 하나의 방패가 되어주고,

이후, 아이도 있어요, 는 더한 방패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여성이었다.

심지어 아주 멀지 않은 과거에 문화계 원로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일도 있었다.

옥선생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이해한다, 남성은 밥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성을 생각한다던 말을.

그를 이해한다, 오죽했으면 성을 구걸해야 했을까 하고.

그러나 그 이해가, 그 사람이 정당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가까운 관계에 있었고, 권력이 있었고, 존경을 받기도 했다.

(위 모든 것은 모르는 이들로부터 겪었던 폭력을 뺀 것이다.

찜질방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골목에서도 그런 일들을, 아무리 반복되어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만났다.)

아끼는 학생이 명상계 종교계에서 같은 일을 당했을 때

나는 피해자가 원치 않아, 그래서 그를 보호하기로 결정하면서

그 일을 묻으며 분노로 피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간 가까이서 멀리서 들은 여성들의 경험에 견주어

내 경험이 결단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믿고 그런 짓을 했던 것일까.

그들 인식을 떠받치던 세계는 정녕 무엇이었던가.

그 가해자들을, 그들의 말을 다시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 지금에 와서라도.

한 여성의 시간과 몸의 서사에 세상 곳곳의 폭력과 차별이 있었음을 다시 인지하며

페미니즘을 되짚는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내가 이 책에 더 가치를 두게 된 건 그가 일하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일 안하나,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네.

사소한 노동이 가지는 가치를 알고 그 역시 노동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다시 말하겠다.

공간을 운영하면서 그 공간이 유지되는 것이 누군가의 노동 없이는 절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그가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이 내게로 왔다, 올 수 있었다.

사유는 부지런했고, 깨어있었으며, 일상의 폭력에 민감하고,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 말하고 글쓰고 성찰하는 기록이었다.

, 그게 명상 아닌가. 수행자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

페미니즘 공부는 지식을 쌓아가는 게 아니라 기존의 관념을 의심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진보는 정치적인 입장만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태도이다! 그렇다.

(홍승은,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권.


p.16
이런 얘기를 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묻는다. 페미니즘에 관해 어떤 책이나 잡지를 읽어봤는가. 페미니즘 담론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가. 페미니즘 활동가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나면, 그들이 아는 페미니즘은 십중팔구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것일 뿐이며 페미니즘 운동이 실제로 무엇인지 거기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세히 알아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도 그런 사람 하나이다.

페미니즘 입문서라 할 만할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다.

 

p.18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학계로 들어가 버렸던 페미니즘을 다시 밖으로 불러내는 데 분명 큰 역할을 했을 책이겠다.

하지만 친절하지 않은 선언문 같아서 불편했고,

(왜 그렇게 말하는가 자주 질문을 던져야했다.

하지만 그 대답까지 이 책에서 요구할 건 아니었다.

이 책은 그것만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더 필요하다면 다른 책을 공부하면 될.)

그러나 페미니즘이 걸어온 역사와 한계를 짚어주었고,

페미니즘을 명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기도.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도 페미니즘적 사고가 필요하겠구나!

 

p.176
남성중심주의만 강조하면 페미니즘 이론가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여자가 다양한 형태로 아동을 학대하는 현실을 쉽사리 무시하게 

한다. 우리 모두 가부장적 사고에 익숙해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지배할 권리가 있으며 어떤 수단으로든 힘없는 사람을 복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지배의 윤리학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정도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이 말하는 것에 설득이 되는 책이었다.

 

p.151

나는 페미니즘운동이 그 어떤 폭력도 거부한다는 광범위한 의제를 표방한다고 믿는 소수의 페미니즘 이론가이다.

 

p.263

페미니즘 정치의 목표는 지배를 종식하여 우리가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게끔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다. 얼마든지 정의를 

사랑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같이 읽어보기로, 공부하기로.

무엇이 페미니즘인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11:40 독서 관련 책 집필을 위한 편집회의 두 번째(어제에 이은).

토론한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로 오후에 한 사람이 글을 썼고,

밤에 합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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