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해가 가려졌지만, 더운 날씨였다.

그래도 바람이 제법 불었다.

집안에서는 덥다고까지 느껴지지는 않았다.

밤에는 심지어 썰렁하기까지 했다. 산마을 날씨 인심이다.


초저녁 서쪽 하늘에 눈썹달 걸렸다.

산마을의 많은 선물의 목록에 그도 있다.

고맙다.


마늘을 수확했다, 열세 접. 딱 우리 먹을 만치.

봄까지 먹을.

올해는 김장도 많이 하지 않으려니 따로 사들일 일 없이.

옛 이장님이 새로 집어 지어 집들이를 하는 날,

학교 아저씨가 물꼬 대표로 다녀오시다.


9월에 출간하려는 책의 원고를 수정하는 며칠.

벌어놓은 엿새 가운데 벌써 이틀을 써버렸다, 한 줄도 들여다보지 못한 채.

꼭 시험 공부하려는데 치워야 할 방이 보이는 식이지.

괜스레 안 보던 책장도 훑어보지.

그러다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스코트 새비지/나무심는사람, 2003)을 꺼냈다.

스스로를 러다이트(기계혐오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과 그의 가족이

미국의 궁벽한 시골에서 태양에너지를 동력으로 

활자와 목판화를 사용하는 인쇄기에

손으로 일일이 종이를 공급하는 옛날 방식을 고수하며

정기구독자 수를 더 늘릴 생각 없이 이 정도에 머물기를 바라며 잡지 <플레인>을 발간한다.

소박한 삶에 이르는 과정에서 서로가 발견한 여러 놀라운 사실을 소개한 책.

그 잡지에 실렸던 글 가운데 가려 묶은 것.

참다운 자유와 행복은

우리가 세상의 주인행세를 그만두고 깊이 겸손해지는 데 있고,

그 겸손은 가난하게, 소박하게 사는 데서 표현된다는 실천적 뿌리에서 나온 책.


흔히 사람들이 기술세계의 습격에 저항해 좀 더 소박한 삶 속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차 떼고 포 뗀 관계를 뜻하는 게 아니다.

게다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원 플러그를 뽑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하지만 웬델 베리는 ‘오히려 모든 게 간편해진 삶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든 삶’을 원한다고 내게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소박한 삶마저도 상품화하는 현대 기업의 광고 카피를 뛰어넘어 안락하고 간편한 생활을 보장하는 고도기술사회의 바깥에 거주함에 따라 생겨나는 복잡함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그러자면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어야 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느껴야 하며,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소박하게 살겠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이나 장소, 물건의 지극히 사소한 부분들까지 다시 배워야만 한다는 뜻이다. 다른 이들과 연결되지 않는 소박한 삶이란 우리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

전원 플러그를 뽑는 일만으로도 우리 삶을 억세게 구속하는 이 기계처럼 조직화된 문명의 손아귀에서 간단하게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때, 희망의 근거가 생긴다. 우리와 기계화된 조직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우리의 에너지가 기술 세계로 공급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 현대 문명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보지도 듣지도 구입하지도 않는 전면적 거부권을 행사하자마자, 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던 현대 문명의 힘은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이 말은 또한 내가 거부하자마자 현대 문명 전체의 힘에서 ‘한사람 분’의 에너지가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이런 저항이 상품화되거나 다른 물품을 구입하는 일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와 현대 문명 사이에 더 이상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

나는 이제 사람들과 진실된 관계를 맺고 자연 속에서 풍부한 삶을 영위하며 늘 신과 함께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이나 스포츠, 혹은 라디오 토크쇼 등을 통해 누군가와 사이비 관계를 맺은 적은 없다.(...)

당신도 충분히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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