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계자 닷새째, 8월 13일 쇠날 맑음

조회 수 1801 추천 수 0 2004.08.15 22:28:00

< 동자꽃 피고지고 >


늦게까지 별똥비를 올려다보던 아이들을
이른 아침 여섯시 반부터 깨워댔습니다.
일곱시에 아침을 먹고 8시를 앞두고 걸어나갔지요.
물한계곡에서 오르는 삼도봉을 향합니다.
해발 1176m.
민주지산과 갈라지는 시작점에서 마음을 다잡고
1지점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들이 손에 쥔 보물지도에 이르기를
타잔이 타고 놀았음직한 커다란 넝쿨이 있을 거라 했고
길이 가파르게 시작되니 계곡에서 충분히 목을 축여 오르라는 곳입니다.
길은 거칠지 않으나 가파르기는 꽤나 됩니다.
오래 묵은 나무들은 뿌리를 드러내놓고
그 하나 하나를 만지고 올려다보느라
걸음은 더디고 또 더딥니다.
"어이!"
"어이!"
앞뒤가 너무 벌어지면 서로 위치를 확인해보지요.
"아름드리 나무들로 숲 그늘 짙다가 갑자기 훤해지며 하늘을 열리고
낮은 나무들이 조금 이어지다 빈대떡처럼 둥근 너른 자리가 나타나는 곳,
그곳에서 한달음에 삼막골재가 있음."
보물지도에 이른 2지점에 닿았습니다.
동자꽃 피고 지고 있었지요.
삼막골재를 지나 1킬로미터를 더 가니
경상북도 충청북도 전라북도가 시작되는 삼도봉이 있습니다.
태어난 후로 이렇게 높은 산은 처음이란 샘도 있었고,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이들이었지요.
우리를 위해 예비된 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보물대'로 구성된 아이 스물 어른 셋이 나섭니다.
삼도봉에서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 사이에 서라,
앞으로 펼쳐지는 바위산을 찾아라,
바위산 앞으로 이어지는 골을 내려가라,
작은 참나무가 한 그루 보이면
그곳에서부터 골을 따라 열 번째 나무를 찾아라,
아주 낮되 토실한 굴참나무 어느 껍질에 그대의 보물이 있으리...
풀에 미끄러지며 한 발 한 발 내려가던 이들이
도저히 나아갈 수 없는 낭떠러지를 만납니다.
우리는 길도 없는 가파른 숲길에 길게 멈춰섰습니다.
장관이었지요.
보물이 있다는 열 번째 땅딸막하나 굵은 굴참나무
그건 낭떠러지에 있었고
우리의 인철샘이 그 아래로 내려섰습니다.
우리의 눈을 벗어난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길었던지요.
"찾았다!"
오랜 침묵 끝에 고함소리 들렀습니다.
미끄러운 풀길에 기다리던 아이들은
그만 낭떠러지로 구를까 일어나 만세도 못불렀다지요.
"올라갈 수가 없어요."
제가 나서보지만 턱없습니다.
맨 뒤에 있던 열택샘이 아래로 내려와서야
인철샘은 겨우 끌어올려져
나무에서 발견되었다는 증거물로 굴피 한 조각에
그 안에 오랜 세월 있었을 작은 종이 뭉치를 내놓습니다.
다시 숲을 나오는 걸음,
기다리던 패들이 아주 길을 막고 보물 좀 보자 난리입니다.
다시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자
우리는 보물이라고 나온 것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돈인가 봐!"
"귀한 그림 같은 것 아닐까요?"
겹겹이 그 종이를 풀고 또 풀자
나온 것은 달랑 종이 한 장입니다.
산을 오르며 보다 건강해졌을 그대의 몸이 보물이라네요,
이곳까지 오른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한 몫하는 그대가 되랍니다.
그래도 서운할 그대를 위해 작은 보물을 학교 우물에 넣어두었다나요.
"이름도 후크 선장이고..."
믿을 수 없다는 용석에게 우진 선수가 한 방 날립니다.
"그거야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고..."
이제 모두 어여 어여 내려가자 합니다.
단숨에들 달려갑니다.
차를 세워둔 주차장까지 쉬지 않고 내달립니다.
우진이는 밑창이 너덜거립니다,
지난 주에도 이만한 산을 오른 그의 신발이니.
끈을 매 주지만 번번이 풀립니다.
여전히 뛰어가는 그이니까요.
영우의 신발 밑창도 힘이 들었나봐요.
달랑거립니다.
가파르기 이를 데 없어 다리는 한없이 후덜거리고
종수가 앞으로 구르고
영환이 무릎이 깨지고
지은이는 신발이 작아 발이 까지고...
그런 속에 발빠른 녀석들이 먼저 가겠다더니
이제 아이들이 하나둘 맨 앞에 섰던 제 앞을 지나쳐 가고 갑니다.
그러는 사이 바뀐 옆자리 아이들로
우리는 무수한 사연들을 만들었지요.
오를 땐 은영이랑 영운이가 함께 여서 이리저리 사는 얘기 오래였고
내려오는 걸음엔
의륭이랑 손을 잡고 한참을 걷고
창기의 끝날 줄 모르는 수다를 듣고
아이들이 바뀔 때마다 그들 사는 량들을 듣습니다.
산이 있어주어 고마웠지요.
그 산을 오를 수 있어 감사했지요.
아이들과 함께 땀흘려 행복했더랍니다.
먼저 산을 내려와 주저앉은 이들에게
복숭아를 팔던 할머니는 기특하다며
허드레 복숭아를 깎아 내고
그게 고마워 다음 패로 내려온 아이들에겐 복숭아를 사 멕이고...
돌아오니 저녁 여섯시도 훌쩍 넘었더이다.

며칠 째 한데모임 끝자락에 이어지던 숙제가 있었습니다.
첫날 악기를 악기로 다루지 않고
엎어놓고 두들겨서 깨진 책임을 어느 샘이 물었거든요.
"유리창 깨진 건 왜 안그래요?"
영빈이가 영환이랑 싸우며 깬
커다란 유리창에 대해선 왜 책임을 묻지 않느냔 말이지요.
"그건 실수니까요."
입바른 여연이가 설명합니다.
결정적으로 장구로 징을 내리친 건 정혁이라지만
그리 놀았던 모두가 책임을 함께 져야 한다 했습니다.
해찬 용석 영빈 원일 정혁 찬희가 나란히 앉아 자기 변호들을 합니다.
(원일이는 제 스스로 자기 또한 그렇게 놀았노라고 나왔더라지요)
"제가 깬 건 아니예요."
우리는 오늘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자기 집 장구이고 괭과리고 징이었으면
그리 함부로 다루었겠느냐고.
다들 아니랍니다.
다음은 이 일에 무엇이 문제인가를 묻습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끝까지 바락바락 우기던 찬희도
마구잡이로 엎어놓고 놀잇감으로 마구 쳐댄 일에 미안하다 합니다.
이제 그 책을 어찌 질 것인가 물었겠지요.
"괭과리를 사서 보내거나
진주에 없으면 돈으로 보내요."
"그런데, 부모님께 어떻게 말씀드릴 건가요?"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책임을 지고 싶다고 하고..."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고 제 돈에서 값을 내요. 징 그거 얼마예요?"
책임이란 것이 잘못을 타인 앞에 드러내는 것 아니냐,
말씀드려야 한댔지요.
"자, 엄마한테 말씀 드렸는데 혼을 내시면요?"
"저는 혼 안나요, 막둥이라서. 엄마가 절대 혼 안내켜요."
얼른 그리 대답해서 애들한테 몰매맞을 뻔했던 용석이지요.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다음부터는 그런 일 안한다고..."
그래서 일을 해결하는 절차까지도 합의를 끌어내게 되었지요.
악기를 함부로 다룬 자신의 책임을 고백한다,
책임을 지고 싶다고 말한다.
엄마한테 돈을 빌린다,
집안일을 해서든 용돈을 모아서든 갚는다...

이리 날마다 같이 살면 정말 깊어지겠는 관계들입니다.
산과 들이 이미 큰 배움이니
'마음길'도 자연으로부터 자연스레 익히고
딱히 뭘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충분히 즐겁게 진리를 탐구해가며 자라나는 아이들이라지요, 이곳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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