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4.물날. 갠 아침

조회 수 750 추천 수 0 2016.05.13 03:08:27


바람이 새벽에야 잦아들었다.

바람은 바깥에만 부는 게 아니었다.

뒤척이다 말간 햇살에 소스라치듯 깼다.

수행하기 전 풀부터 맸다.

묵었던 이가 나와서 같이 뽑았다.

그렇게 삶을 나누고 있을 때 마음 좋다, 일을 얼만큼 하느냐가 아니라

내 삶터에서 생활을 나누고 있을 때 관계에 느껍다.

그냥 좋은 거 그거 별로 안 믿는다.

일상을 함께 나눌 때 공고해지더라, 나는.

간절하게 같이 삶을 나누고팠던 이가 있었는데,

영영 보지 못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같이 풀을 뽑아보지 못했다.

돌아보면 안타까웠던 한 인연이다.


엊저녁 20년 전 물꼬에서 몇 해 같이 일했던 샘 하나가 왔다.

그 20년 전으로부터도 한참 전,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냈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함께했던 이 공간인가.

그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했다.

작으나 안정감이 있을 수 있는 건 순전히 그 모두가 만들어준 시간 덕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는 얼마 전 와서 물꼬에 여전히 뭔가 할 일을 찾아주었다.

“이것들 돌아다니는 거 못 보시잖아요.”

그렇지.

아, 몇 해 절대적인 시간을 같이 보냈으니 습이며 얼마나 많은 걸 알 것인가.

나,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러면서 공구 정리 벽 혹은 시렁을 만들어주러 온다 했고,

어제 치수를 재러 왔다.

“좋네요. 자연이 좋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안 계시다면 이곳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물꼬가 있으니까 이 공간이 의미가 있다는.

아, 공간이란 그런 거다.

아이들한테 그렇게 잘 웃는 사람이 어른들한테는 정말 안 웃었다, 옥선생님 옛날에요,

그가 말했다.

“심지어 적대적이셨지요, 어른들한테.”

아, 나 그랬구나.

“지금은 어른들한테도 잘 웃고 계시군요.”

아, 그렇구나. 시간이 흘렀고, 나이를 먹었고, 날도 좀 뭉툭해졌고,

무엇보다 적대적이었던 ‘어른’이란 존재들에 연민이 생겼다.

어떤 삶인들 수고롭지 않겠는가.

거기 앉은 당신도 애썼고, 저기 앉은 당신도 애썼다.

그리하여 좀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물꼬의 기능이 아이들 학교뿐만 아니라 어른의 학교로도 차차 넓혀갈 수 있게 된.


오늘 공을 좀 쳤다.

오는 25일 작은 경기를 하기로 했다.

감독이나 코치가 아니라 선수다, 선수.

아, 얼마 만에 그런 걸 해보는가.

오늘 연습 좀 많이 했다.

손이 벌개졌다.

뜨거운 시간은 뿌듯함을 부르지.

좋더라.


들어오며 면소재지 품앗이샘 댁 들리다.

고추 5천포기 심기 의논.

다음 주에는 이러저러 붙어서들 심기로.

그 끝에 달골 작은 굴삭기 작업 날짜를 어찌어찌 잡아보다.

그는 알까, 그렇게 마을을 들어오다 벗네 들러 이런저런 얘기 나누면

일도 일이지만 생각을 정리도 하게 되고 위로도 받는다는 걸.

이 산마을에 그런 벗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 오래 생각했더랬지.

그의 삶의 지혜가 서툰 내 삶의 미욱함을 일깨워주기도.

고맙다, 산골 벗이여!

한 관계에 계속 화가 좀 나 있었다.

“내가 자주 그로 인해 번번이 마음이 상하네.”

“너무 가까워서 그런 것 아니에요?”

아, 그래, 그 거리, 그래서 기대도 하고, 서운해지고.

그런데, 그와 내가 ‘같다면’ 일어날 일이 없는 다툼이다.

사랑할 때만 해도 우리는 그 다툼으로 힘들어하며 그와 내가 같았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정작 사랑은 서로의 차이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의미이다.

허니 다툼은 필연.

어떻게 다투는가가 문제이고, 다툰 뒤 그 다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문제.

‘사랑으로 일어나는 싸움에서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한 쪽이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고 마는 것. 그래야 다시 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다. 나는 계속 질 것이다.’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 가운데서)

질 수 없어 사랑도 못하는 우리네라.


그리고, 그대 연애에 부쳐-

품앗이샘 하나가 연인을 소개했다.

어여쁘더라, 사진도 그랬지만 사진보다 훨씬.

연애를 시작했다길래 오직 잘해주어라 했는데, 잘해줄 수밖에 없겠더라.

고맙더라, 서로를 알아보고 짝을 찾아.

오는 달날 체육활동 마지막 시간을 마치고 같이들 밥을 먹기로 하다.

(“물꼬에 가야만 뵐 수 있는 옥샘을 밖에서 뵐 수 있다니!”

무슨 산골 깊숙이 박혀 사는 사람이라고...

이번 학기는 저녁마다 바깥수업인 걸.)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하는 법이다.

그런 마음 아니라면 그만두어야 할 연애 아닐까 싶데.

하기야 미운정도 정일지니, 늘 사람이 좋기만 하랴만

미움이 들 때도 함께 보낸 시간으로 그 마음을 묻을 수 있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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