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8.불날. 흐리다 비

조회 수 775 추천 수 0 2016.03.26 06:17:22



p.114~115

... 이미 봄옷을 입은 계곡의 나무들은 우리와 같았다. 이들도 말은 못 하지만 더위와 추위,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고 태어나고 죽는 인간과 같다. 바람이 불면 꽃가루를 뿌리고 신기하게도 태양의 여정을 쫓는다. 바위는 그렇지 않다. 바위는 생명력을 머금고 있지 않은, 태초부터 죽어 있는 것이다. 완전히 냉담한 수동성 그 자체다. 숨어 있는 정령을 잡으려면 보루 하나하나를 철거해야 하는 요새였다. 변덕스런 니켈 정령은 이리저리 튀며 잘 빠져나가고 사악하다. 뾰족한 귀가 있으며, 찾기 위해 곡괭이로 쪼면 늘 피할 준비가 되어 있고,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찾지 못한다.


하지만 꼬마 요정, 니켈 정령, 코볼트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화학자다. 다시 말해 사냥꾼이다. 우리에게는 파베세가 말한 것처럼 "어른이 되어서 겪는 두 가지 경험", 곧 성공과 실패밖에 없다. 흰 고래를 죽이든지 난파되는지 둘 중의 하나였다. 불가해한 물질에 굴복해서는 안 되었다. 그냥 주저앉아서도 안 되었다. 우리는 실수를 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얻어맞고 다시 한방을 되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무력하다고 느껴서는 안 된다. 자연은 무한하고 복잡하지만 지성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주위를 돌면서 찔러 보고 들여다보아야 한다. 들어갈 구멍을 찾거나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매주 중위와의 대화는 마치 전투 작전을 짜는 듯했다.


손에 잡히는 책 한 구절을 시처럼 읽었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가운데서.


비 내렸다.

이런 날엔 수제비나 부침개.

점심에 수제비를 끓여 이웃과 나눠먹고,

저녁엔 부침개를 부쳤다.


끊이지 않는 계곡 물소리와 함께 온갖 소리들이 잠 속으로 들어와 설친 잠 끝,

어디 있으나 수행으로 여는 아침.

수련하고 절하고 명상하다.


영춘화 피었더라.

꽃 따서 식탁에 놓다.

겨울 난 아이비도 담에서 한 가지 꺾어 방에 들이다.

묵고 있는 커다란 방을

김옥균의 서예작품이며 헤아릴 수 없는 다기들이며 갖가지 진품명품들이 채우고 있는데,

가지 꺾인 꽃가지 하나만 못하더라.

살아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리.


여기는 지리산 아래 구례.

어제는 내복을 벗어야겠다 싶더니

흐리다 비 내리는 날씨가 오늘은 싸했다.

난로에 달군 돌로 손을 데워가며 지내다.

소리도 하고 춤도 추고 그림도 그리고. 몇 어른들과 어불려서.

그러기로 한 걸음이더니 아무래도 소리만 하고 가겄다.

밤이면 폐교된 학교 교실 한 칸 침낭에 들어 홀로.

그렇게 아침도 홀로 깼다.

밤엔 여름 장마통에 불어난 물소리처럼 계곡에서 건너오는 물소리며

건물이 뒤척이는 소리 장작이 아궁이에서 툭 떨어지는 소리, 풍경소리,

이곳에 사는 존재들이 기웃거려 뒤척이다.

지난주 호되게 장염(이라고 추정하는)을 앓은 뒤끝이라 계속 장이 편치 않은 날들,

간밤에도 불편이 따라왔댔네.


아침 챙겨먹고 돌아서서 점심,

저녁 밥상에는 봄풀 캐다 된장소스 만들어 샐러드로 내다.

이런 일이야말로 가장 진지해지는 일이다 싶은.

나이 먹고, 돌고 돌아 이른 곳에 있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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