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설악산 소청봉에서 봉정암으로 내려서던 길이었다.

한 사내가 뒤에서 걷고 있었다.

좁은 길이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는 길이었다.

눈은 깊었고, 우리 걸음은 더뎠다.

나뭇가지는 눈을 업고 낮은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른 시간이었으니까.

몇이 그 길을 적당히 거리를 두며 걷고 있었다.

어디서 잤어요?”

이른 아침이라 한계령휴게소에서건 남설악 오색에서건 남교리건 거기 이르기 힘든 시간이니

중청대피소에서들 잤겠거나 하고 그저 묻는 말이다.

사내는 파주에서 왔고, 고향이 해남.

대한민국에서 좋은 한 곳만 꼽으라면 달마고도 둘레길을 꼽겠다는 그였다.

언제가 (가기에) 가장 좋을까요?”

언제라도 좋지만 가을이면 더 좋을 거라고.

, 사람이 많겠구나.

가을에 가는 건 접었다.

그래서 이 봄날 달마고도 둘레길로 가게 된 걸음이었다.

 

광주에서 오전에 일을 끝내고 해남으로 넘어갔다.

시계는 낮 3시를 지나고 있었다.

달마산 미황사 뜨락이었다.

17.74km 달마고도 둘레길. 6~7시간 걸린다는.

결정해야 했다, 오늘 돌자면 일부 야간산행은 피할 수가 없다.

아니면 내일 일찍부터 돌거나.

우린 걷기로 했다.

 

바위산이었다.

한참을 너덜이었다.

이럴 땐 네팔 안나푸르나 마르디히말의 베이스캠프에 이르던 너덜이 꼭 떠오른다.

산에 사람이라고는 없고 안개 덮쳤던 그 산.

살아도 좋고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는, 혹은 그리 위대할 것도 보잘 것 없을 것도 없는

생을 환기시켜주던 그런 길.

걷기 좋은 오솔길이 이어졌다.

둘레길 4분의 1을 지나서부터는 완도대교를 내려다보며 걸었다.

산세는 산세대로, 다도해는 다도해대로 눈이 환해지는 둘레길이었다.

조금씩 대교가 멀어지고.

마주 오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늦은 시간.

그렇지 않더라도 대개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길이라.

4분의 2를 지날 즈음 방심한 마음에 들어오는 창처럼 사내 댓 명 뛰다시피 맞은 편에서 나타났다.

점심을 먹고 둘레길에 들어섰다며 달려가고 있었다.

이 길을 중장비 쓰지 않고 주변의 돌을 모아 사람의 힘만으로 만들었더라지.

미황사에서 큰바람재, 출가의 길 2.71km

큰바라재에서 노지랑골, 수행의 길 4.37km

노지랑골에서 몰고리재, 고행의 길 5.63km

몰고리재에서 미황사, 해탈의 길 5.03km


12km나 남았는데 해가 넘어간다.

이제 산에 저녁이 내릴 것이다.

땅끝마을로 가는 땅끝천년숲옛길에서 길은 갈라지고,

곧 삼나무 깊은 숲에 들어섰다.

다음은 어둠 속에서 움직였나니.

가끔 단이 낮아지는 지점에서 잠시 몸이 기우뚱거렸고

지난 겨울을 난 나뭇잎 더미에서 균형을 잃으며

밤 숲을 걸었다.

15:17 출발해서 20:30 다시 미황사였다.

다섯 시간을 조금 넘어선 시간이었다.

우리는 어둔 산길에서 해탈해버렸더라.

생전 그런 거에 관심 없던, 완주기념 인증 그런 것도 하고.

관음암터, 문수암터, 노지랑골, 도시랑골, 몰고리재, 너덜, 그 여섯 지점에서.

 

달마고도 둘레길에는 500m 간격으로 거북이 모양이 담긴 안내석이 섰는데,

그것 말고도 사이 사이 달마고도 표지목이 있다.

그 표지목으로 말할 것 같으면...

2018년 바르셀로나를 한 해 동안 건너가기 전이었다.

201712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을내 달골에 짓고 있던 사이집은 마무리를 못하고 있었다.

멈춰야 할 때였지만,

그래서 적어도 한 달은 갈 짐도 싸고 남을 상황도 한 해를 비울 준비를 해야 하건만

사람도 일도 정리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예 1230일까지 일을 하고

짐을 가방에 쑤셔 넣고

둘러볼 남겨질 살림도 채 정리를 못한 채 비행기에 올랐더랬다.

12월이었다.

물꼬에 머물고 있던, 집 짓는 일에도 인부로 일하던 무산샘이

새해가 되면 곳곳에 둘레길을 만드는 일을 하는 회사에서 일을 하기로 결정했고,

이미 일을 맡기도 했다.

일찍이 그는 지리산 둘레길을 만드는 데 공로가 컸던 인물이었다.

12월이 다 가던 주에 우리는 면소재지 길가에 쌓인 낙엽송을 눈여겨봤고,

사서 달골로 옮겼다.

나무를 깎고, 자르고, ‘달마고도글씨를 파고 거기 먹으로 글씨를 채웠다.

그 붓질을 콧물 흘리고 했더랬네.

달마고도 표지목은 표지석으로 대체되어 있었지만

곳곳에 아직 남은 달마고도그 익은 글씨였다니!

반가웠고, 12월이 애잔하게 떠올랐다.

 

두륜산 도립공원 아래서 밤을 나다.

대흥사를 들러 돌아가고자.

대흥사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내게 전해주셨던 성우향 선생님과 인연이 있던 곳이라.

내일은 또 내일 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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