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6일, 성적표(?)를 쓰기 시작하면서

조회 수 1610 추천 수 0 2004.07.30 16:35:00

아이들과 같이 아침을 시작하고 함께 잠자리로 가고...
오랜 꿈이었고 드디어 그리 살게 되었지요, 2004년!
긴 시간을 준비했다고는 하나
언제나 코가 석자여서 닥친 일들을 하느라 버거웠고
계절학교나 방과후 공부를 통해 연습을 해왔다고는 하나
연애와 결혼이 다르듯이 다른 질로 들어와 보니
그게 그렸던 그림의 꼴과는 거리가 있게 마련이었겠지요.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훠얼씬 좋습니다.
늘 최악과 최선을 동시에 생각하는 장점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언제나 그래왔듯 아이들이 여전히 위로고 위안이며
신이 왜 형편없는 순간에서조차 이 지구를 포기하지 않는지,
지난 봄 학기와 아이들이 공동체에 머무는 두 달은
그 까닭을 다시 이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시험(점수)을 떠나 진실로 진리를 향한 탐구가 존재하는 학교,
일을 같이하며 우리 먹거리를 우리 손으로 챙기는 건강한 학교,
우주와 나하고의 관계를 탐색해 가는 깊은 사유와 영성이 있는 학교,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마주하는 학교...
성급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런 배움의 길 그리고 삶의 길이 역시 옳다는 확신이
더 단단해진 시작이었습니다.

이곳 공동체에선
어떤 유행이 텔레비젼이나 상업적 도구들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연 안에서,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디다.
이 거대한 천민상업자본주의 아래에서 주도적인 문화와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우리만의 문화를 만들고 싶어했던 까닭도 다름 아니었을 것입니다.
장마가 지나고 여름 밤별들이 대해리로 쏟아내리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별자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니
서로 알고 있는 것을 나누고 책방을 뒤지고
밤마다 목들을 길게 빼고 있더랍니다.
매듭이 유행이었듯이
보석이라며 광물을 캐는 광산놀이가 유행을 했듯
어른들 연구모임 따라 간디연구가 유행처럼 일었듯
쌓여진 재활용 도구들로 만들기가 유행했듯.
허드렛종이로 종이를 한창 접더니
집에 다녀오면서 새로운 종이접기책을 챙겨와
그 시간은 심화시켜나간 것도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지요.
유행이 흔히 말할 때의 그 천박함을 벗고
무슨 대헬레니즘문화를 만들 듯
아이들 안에서 배움, 진리의 문화를 그리 만들고 있더랍니다.

처음이므로 들어서기에 그리 힘든 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실험현장에 아이를, 그리고 자신의 삶을 던지기가
결코 수월치 않았을 겁니다.
지지해준 부모님들께 깊이 고개 숙입니다.
2004학년도 입학한 우리 아이들과
이곳을 함께 일구고 있는 공동체 식구들한테도
특별히 고마움을 전합니다.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아이들 얼굴 하나 하나를 떠올립니다.
이제 성적표(?)를 쓰려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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