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4.흙날. 맑음 / 입춘제

조회 수 276 추천 수 0 2023.03.05 23:54:50


대보름이 내일, 달은 벌써 둥그랬다.

가평의 한옥에서 짐을 푼 밤.

 

영화 <세시봉>을 채우던 음악들로 가득했던 아침이었다.

기표샘의 살핌이었다. 그네 집이었다.

아침밥상까지 받고

같이 청소를 하고 익선동까지 그가 부려주고 돌아갔다.

아쿠, 차 주유라고 해주는 걸 놓쳤고나.

우리가 계속 만날 거라는 게 안심이다.

 

익선동 재형샘 댁에 사람들이 모였다.

물꼬 연어의 날에 꼭 모이는 분들이라.

시인 이생진 선생님은 며칠 전 일정의 여독으로 번에는 동행치 못했다.

승엽샘과 광주의 소리꾼 준찬샘까지 오고

우리는 가평으로 움직였다.

열 몇 채 한옥으로 펜션을 하는 주인장이 작은 예술마당을 여는 밤.

얼음판 위에 달집을 세워놓고 있었다.

내일이 대보름. 오늘은 입춘이기도. 하여 나는 입춘제라 부르겠다.

대보름은 아직 아니잖여.

소원문을 써서 넣고, 비나리를 하고, 달집을 태우다.

신은 다 알제.”

일일이 제 소원 챙기지 않아도 신은 우리 바람을 안다는 소리꾼 준환샘의 말이 닿았다.

화백이 그림을 그리고, 낭송가가 시를 낭송하고, 가객이 노래하고,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고,

조각가가 있었고, 시인이 시를 읊고, ...

 

모 신문 기자도 온다고 들었다.

곧 퇴임한다는데, 그 신문사 기자라면 이름쯤 들었음직도 한데,

이름을 두 차례나 물었으나 아는 이가 아니었다.

그가 도착하기 직전 누군가 그가 곧 온다 말했다.

, 그제야 그 이름자를 생각해냈다. 잊히기 어려운 이름이다.

웬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아~”

사연을 전해들은 승엽샘이 곁에서 장난스레 내게 흥얼거렸다.

30년 전 그의 취재요청을 거절한 적이 있다.

그 신문사의 어떤 기사로 뭔가 꼬인 마음이 있었는데,

거절이 너무나 뜻밖이었는 양 불쾌하다는 느낌으로 끊어진 통화였다.

불쾌함이었다고 기억하는 건 바로 그 해 그 신문사에서 대안학교 연재기사가 있었는데,

당시 그 바닥은 물꼬를 빼놓을 수 없는 시기였는데도

물꼬가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복당한 느낌으로 남았다.

오래 전이고, 잊고 있었던 일이라 더욱, 사실과는 얼마나 거리가 있는 건지 잘 모른다.

우리는 자정이 다 돼서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럭저럭 반가워했다.

시간이, 그렇게 긴 시간이 끼어들었으니 앙금이 있었다 해도 남을 게 무엇이겠는가.

더러 떠났고,

새벽까지 여자 몇이 족욕탕에 발을 담그고

그가 쓴 기사들을 둘러싼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었다.

나이를 먹는 것 세월이 가는 것 괜찮다.

남을 마음이 없어지는 것 썩 괜찮다.

 

아침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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