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두 주먹, 큰 자두 셋, 사과와 참외와 복숭아 한 개씩, 삶은 고구마 댓 개.

아들에게서 전송된 사진의 넓은 종이상자에 담긴 비닐꾸러미의 내용물은 그러했다.


바르셀로나에서 1년을 보내게 되어 1월 1일 비행기에 올랐을 때 스무 살 아들은 한국에 남았다. 

혼자 2월 말에 전세가 만료되는 집이 이사를 간 곳은 한 층에 두 집이 마주보는 구조의 아파트였다. 

애는 어쩌고 가느냐고들 걱정스레 묻기도 했지만 저는 저의 일이, 우리 부부는 우리의 일이 또 있을 것이다. 

부모고 형제고 자식이고 서로 아쉬운 소리만 아니 해도 서로를 돕는 거더라, 늘 그리 주장해온 식구들이었다. 

어머니가 잘 지내시는 게 저를 돕는 건 줄 아시지요, 

시골과 도시에서 떨어져 사는 동안에도 그리 격려하기까지 하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일상의 고단함, 학과 특성상 많이 부과되는 공부의 양, 

관계에서 오는 좌절들을 한 번씩 토로하며 울먹인 적도 있는 그였다. 

텔레그램 같은 메신저 서비스가 있어 지구 반대편에서도 소통이 쉬운 시대가 어느 때보다 고마웠다.

“한 번씩 가족 부흥회나 법회가 필요한 친구라니까!”


2014년, 한국의 자유학기제 모태가 된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를 돌아보는 한 달 연수를 다녀간 그해 

한주 동안 이 도시를 다녀갔다. 그때는 아들도 동행했다. 

일 년 중 가장 더운 때라는 8월 초, 기온은 40도 가까이 오르기도 했으나 

거리의 나무 그늘에서 선선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중해성기후는 그랬다, 쩍쩍 땀이 달라붙지 않고 바람결이 좋은 여름이었다.

와인은 놀랍도록 흔했고, 해산물과 고기는 싱싱했으며, 풍성한 채소와 과일은 퍽 값쌌다. 

가우디의 흔적들을 좇았고, 축구광 식구들이 FC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캄프 누를 들렀다. 

여행 온 한국인들을 두엇 스치기도 했다. 

남편이 안식년을 앞두고 있었고, 

스웨덴의 웁살라대학에서 보내리라던 계획을 바꾸어 바르셀로나대학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새벽잠을 설치며 유럽리그를 보지 않아도 되며, 

무엇보다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눈앞에서 관전할 수 있다는 매력이 컸다. 

나 역시 운 좋게 아일랜드의 한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되어 

이 도시에 생활중심을 두고 저가항공으로 움직일 계획이었다.


4년 만에 온 바르셀로나에서 생활인으로 느낀 가장 큰 변화는 배에 가깝게 오른 집값이었다. 

여러 행사에서 여행자들의 숙소로 현지민들이 삶터를 앗기고 있다는 현수막들을 만났다. 

카탈루냐 독립을 지지하는 분리주의자들의 노란리본이 세월호 추모처럼 도시 곳곳에 날리고도 있었다. 

청년실업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어 어슬렁거리는 젊은이가 넘치고, 소매치기가 대단히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국 특유의 낙관으로, 

또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이 빚은 활기로 도시는 여전히 싱그러움을 잃지는 않았다.

여행자숙소에서 한 달을 보낸 뒤 현지인들 많이 사는 그라시아 지구 아래쪽 끄트머리에 집을 구했다. 

느긋한 보헤미안 분위기의 몇 광장은 언제나 분주하고, 

활기찬 바와 풍성한 카페들이 즐비한 거리 위로 구엘공원이 이어졌다. 

가끔 구엘공원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거나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에 등장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저녁을 먹은 뒤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담긴 연못 둘레를 산책했다. 

그럴 때마다 모든 국민이 바르셀로나를 다 다녀간다는 착각이 들만큼 

날마다 놀랍도록 많은 한국인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컸다. 

중년의 호사를 누릴 만한, 생에 별 없었던 1년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과 다른 길을 죽도록 경험한다는 사람살이가 바르셀로나의 내 삶에서도 다르지 않았으니. 

오랜 병상이었고, 일은 어그러졌다. 새옹지마라. 

그런 변화가 있지 않았다면 

굳이 바르셀로나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여유 같은 건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시드니며 시카고며 몇 곳에서 여러 해를 보낸 시기가 있었지만 

그곳에 사는 한국인들을 찾을 일은 거의 없었다. 

한국인이 드문 주거지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먹고 사는 일이 늘 엄중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2000년대 한인의 외국살이란 그 이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단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났던, 미국으로 간 첫 한인 이민이었던 구한말도 아니고,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와 유학생·주재원을 중심으로 이민사회를 형성했던 1960년대도 아니고, 

이제 이민사가 설움의 역사인 시대는 아니다. 바람결에 고향말만 들어도 가슴이 일렁이는, 

애국가가 나오면 눈물이 절로 나던 설움의 이국생활이 옛이야기가 될 만큼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외국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아주 이주하는 경우가 아니어도 외국에 머물 기회들 또한 많다. 

2018년 추석연휴 112만 명이 인천공향을 오갔다 했다. 

시골마을 부녀회에도 유럽여행 이야기가 별 얘깃거리가 아닌 시대다. 

그러니 외국에서 사는 한국인이 그리 눈에 띌 것도 없었을 것이라.


가지고 온 일 대신 간간이 일을 찾아 하는 가운데 

미뤄두었던 책을 쓰면서 여름부터는 얼마 쯤의 한국인을 만났다.

“바르셀로나에 사시는 게 뭐가 좋아요?”

“날씨가 가장 좋죠. 또, 감자만 먹고 살아도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지,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여행 가고 싶으면 가고, ...”

이곳에서도 다만 걱정이라면, 어디서나 부모자리가 그렇듯, 자식 걱정이라고들 했다. 

이곳의 칙칙한 가을 빛과 한국의 찬란한 천지빛깔의 가을이 대척점에 있고, 

이곳의 높푸른 하늘과 미세먼지로 뿌연 한국의 대기가 상반되어도, 

어느 곳에서든 아이들이 자라고 우리는 그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88년 서울 올림픽 전후 태권도로 진출한 사범들이 한국인 이민 1세대이니 스페인 이민 30년 사. 

몸의 구조에 대해 익숙한 그들은 침구사·물리치료사·척추교정사 같은 몸 관련 기술로 직업이 확대 변천했고, 

10여 년 전부터는 한인민박집들이 대거 생겨났으며, 5년여 전부터 여행사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한다. 

이민 1세대로 이 도시의 삶을 시작한 이웃의 한 부부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두 분이서 일하고 지쳐 들어가 밥을 하려면 얼마나 고단하실까, 이왕 하는 찌개 좀 넉넉히 해서 나누고는 하였다. 

아들과 남편은 학교로 일터로 도시를 기반으로 움직이지만 내 기반은 산골, 한국에서 우리는 주말가족이었다. 

낡고 오래고 너른 산골살림은 돌아서면 밥 때이고 돌아서면 풀을 매야 했다. 

누가 잠깐 쌀자루 하나만 들어주어도, 누가 잠깐 이불 하나 맞잡아주어도, 

누가 잠깐 사다리 아래서 전지가위만 집어주어도 고마울 삶이었다. 당신들이라고 아니 그럴까.

유학 온 공대생 남학생 하나도 자주 밥상 앞에 불렀다. 

한국 책을 하나 구할 일이 있어 닿았던 인연으로 때때마다 젊은이다운 순발력으로 정보를 구해주던 그였다. 

어느 때는 내가 찾던 물건 하나를 40여 분 걸어서 구해오기도 하였다.

“완전 아들일세. 아날로그 엄마에게 우리 아들은 포털사이트거든.”

예서 금치라 불리는 김치를 담가 젊은 친구들과 더러 나누기도 하였다. 고솜한 맛은 없어도 배추는 배추였으니까. 

먹는 게 어디 귀한 시대인가. 못 먹을 일이 드문 세상이라.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밥을 귀하게 여기는 중늙은이, '옛날사람‘이다.

여구하게 사람이 밥 힘으로 산다 믿으며, 산마을에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일도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이는 것이다. 

이 밥 먹고 세상으로 나가 그저 한 걸음만 더 걸어갈 수 있다면, 그런 기도인 셈이다. 이곳에서도 그렇게 한 밥이었네.


지난 한가위, 옆집에서 과일을 나눠주셨더란다. 연휴에도 추석 당일을 빼고 해부실습이 이어진다던 아들이었다. 

친척 댁에도 못 가고 집을 지켰더라지. 엊그제는 김장을 한 옆집에서 김치가 건너왔다 한다. 

어디서고 사람이 사람을 기대고 산다. 마음과 마음이 닿고 마음과 마음이 흘러 건너가는 사람살이일지라.

“어머니가 거기서 밥을 나누시니까 제가 여기서 밥을 얻어먹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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