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18.불날. 맑음

조회 수 363 추천 수 0 2020.08.31 15:09:46


 

제도학교 분교 방학 중 근무 사흘 가운데 첫째 날.

그렇지만 돌봄교실이 본교와 분교 합쳐 본교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본교 특수학급으로 달려간 아침.

돌봄실이 싱크대 공사를 하는 동안 잠시 쓰였던 우리 교실은

아직 탁자에 짐들이 너저분했고,

책상이며들에는 얇고 파리하게 곰팡이가 앉아있었다, 냉장고 문짝에도.

바닥 모서리로는 죽은 벌레들이 무더기.

언제나 시작은 청소로.

 

이런! 컴퓨터가 두 대 다 비번이 먹히지 않는다.

하나는 본교샘이 다른 하나는 내가,

그래서 본교 이름이, 다른 건 분교 이름 관련으로 비번을 정한 게 분명한데,

왜 먹통인가?

믿어 의심치 않는 비번인 걸.

그동안 혹시 학교 전체 시스템을 바꾸기라도 한 건가,

주무관님 불러 확인도 하고.

거의 절망 상황, 비번을 영영 기억하지 못하면

안에 든 모든 자료를 포기하고 열어야 하는 상황.

근무일이 아닌 동료에게 전화 넣기가 쉽지 않은데

도저히 안 되겠다, 그래도 확인을 해야겠다 하고 문자 막 넣었는데,

바로 나타난 본교 특수샘.

선생님 나오시는 줄 알고 인사도 하고...”

그렇게 오신 걸음이라는. 방학 중 활동 학교카드 사용법도 설명해주셔야 했던.

“(비번) 되는데요...”

? 왜 나는 안 되었던가?

선생님, 끝에 그거!”

아하, 그랬다. 우리 같이 덧붙인 게 하나 있었다.

비운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는 그걸 잊었는가.

주중 제도학교와 주말 비제도학교를 오가는 일정이었던 1학기 동안

어쩌면 내가 살아남는 방법은 그런 것이었던.

이곳에선 오직 이곳 일만, 저곳에선 저곳 일만.

깡그리 이곳을 잊었고, 한참을 비웠던 거다.

오전에 출근하자마자 처리할 문서 두어 개는 그래서 늦어진.

 

교사들이 드나들며 교장실과 교무실에 인사들을 넣는데,

서툰 나는 언제나 특수학급에만 있었다.

그래서 교장샘도 인사를 하러 내려오시는.

오늘만 해도 메신저 안에 근무 상황이 뜨니 알고서 내려오신.

돌아보니 제도학교 지내는 동안 늘 그러했네.

오히려 찻상을 마련한 특수학급이

참새방앗간처럼 사람들이 들리거나 외려 인사를 하는 곳이 된.

1층 현관과 멀지 않아서도 그러했을.

뒤늦게야 참 내 집 같이 살았구나 돌아보네.

 

09시부터 특수학급 아동 한 명과 특수학급 소속은 아니나 언어치료가 좀 필요한 아이 하나,

둘을 데리고 동화로 접근하는 언어치료수업.

재밌는 이야기 속에서 낱말들을 쪼개고 합치며 발음하기.

그리고 따로 떼놓고 읽고 이어 연음 훈련하기.

도서관에 가서 관심 있는 그림책들을 뒤적여 각각 세 권씩 끌어안고 와서 같이 하다.

4학년과 2학년으로 학년 차가 있으나 치료 목적은 동일하여 함께한.

둘이 오누이이기도.

방학 전 따로따로 훈련했던 내용이기도 하고.

아무도 내게 이 일을 하라지 않았다, 80년대 불렀던 시절 노래 한 구절처럼.

제도학교 일이 특히 그런 듯, 하고자 하면 한없고 하지 않으려들면 또 그럴 수도 있는

(대신 다른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는).

물꼬의 방식대로, 할 만한 사람이 할 만하니 하는 것.

2시간씩 하는 사흘의 수업으로 무슨 대단한 치료가 일어나겠냐만

특히 2학년 아이는 습관적 낱말읽기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11:30.

중학 진학을 앞둔 아이와 분교 들렀다가 도시행.

이 아이가 사는 곳은 시와 경계를 이루는 곳,

하여 이 관내와 공동학구인 도시를 건너가다.

중학교는 그 쪽으로 다닐 거니까.

유치원 때 엄마를 잃은 아이가 여자 어른과 했을 경험이 거의 없었을

바깥밥 같이 먹고 같이 노닐고,

그리고 소근육 훈련을 위한 도예공간도 가고,

같이 버스 타기 훈련 뒤 다시 집까지 데려다주고,

이 일 역시 누구도 내게 하라 한 적 없지.

물꼬가 그렇게 흘러왔듯, 이곳에서도 그러 할지라, 한 대로 배운 대로.

 

날이 몹시 더웠다.

낡은 차의 에어컨도 감당이 안 된 34도라.

녹초가 되어서 분교에서 본교로 돌아오는 이른 저녁 길,

아이들이 방과 후에 모이는 공동체회관에 들리다.

시원하니까.

본교로 돌아가긴 이미 늦고, 랩탑을 안고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애들이 출출하다고 먹을 거 없냐 그럴 때

마침 차에 뭔가 있나 뒤져볼까 하고 나갈 적

짠하고 참치주먹밥을 공동체 어른들이 들여보내주었네.

곧 외부에서 들어온 이들이 진행한 풍선아트 수업도 하나.

그렇게 만들어진 칼로 우리들은 같이 칼싸움도 하고.

그때 6학년 한 아이, 저도 한동이 따라 버스타고 싶어요, 한다.

다른 4학년 한 아이는 8월 마지막 주 약속을 잊지 않았냐고 물었다.

개학하면 지노와 가경이랑 학교 체육관에서 놀기로 했더랬다.

방학식 전 비가 엄청 쏟아서 시커멓던 날, 아이라고 다섯이 학교에 전부였던 날,

두 아이가 나랑 체육관에서 놀고 싶다고 특수학급을 찾아왔을 때,

그때는 시간 못 내고 개학 후로 밀었던

그럼, 그럼, 잊을까 봐 희망반 데스크탑에 포스트잇 붙여놨지!”

아직 내게 할 일이 여러 남은 제도학교 일정이라.

 

바느질 모임에서 찐 옥수수를 내주었다. 저녁밥이 되었네.

코로나19의 세상과 신의 땅은 모르겠고

나는 내 하루를 그리 모시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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