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10.해날. 자정께 비

조회 수 2706 추천 수 0 2011.04.18 04:48:44

 

 

 

아침밥으로 미소식 국을 해놓았습니다.

어른도 아이들도 해날 쯤은 부엌일에서 벗어나

쉬기도 하고 시간도 잘 쓰라고

수행하고 명상하는 해건지기가 없는 해날마다 제가 밥상을 차리기로 하였지요.

‘해날큰밥상’이라 부릅니다.

느지막히 일어나 각자 자기 흐름대로 먹기로 했습니다.

왔던 반찬이 이제 바닥이 났고,

하여 두어 가지 찬도 마련해두었지요.

첫날 가져온 반찬을 꺼낼 땐

돌아갈 때까지 반찬 아니 하고 지낼 것 같다고들 했는데,

여러 사람의 입이 그리 무서운 겁니다.

먹을 사람만 오기로 했더니,

아이 둘과 아지샘이 빠졌습니다.

나중에 후회했다는 소문이 있었지요.

 

오전, 달골로 다시 올라간 아이들,

빨래를 하고 개인과제들을 하거나 쉬었다 합니다.

떡볶이와 라면사리도 나온 점심밥상을 받은 아이들은

돌고개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형이와 진하가 자전거를 타다 서로 부딪혔다네요.

하늘이 고마웠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물꼬의 기적이라 부릅니다.

크게 부딪혔으나 상처가 가벼웠지요.

그 가운데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과를 하는 방식,

서로 헤아리는 마음에 대해 살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풀면 될 것입니다.

진하가 특히 얘기를 나눈 뒤 시원해했습니다.

자고 일어나서 아프지 않아야할 텐데요...

그런데, 어느 트럭아저씨가 그 상황을 보고

안전교육이 안돼 있다며 남자애들한테 기합이라는 걸 주기도 했다네요.

새참으로 첫날 아이들이 선물로 가져왔던 쿠키를 내고

포도즙을 곁들였습니다.

먹는 것으로도 기분이 나아진 아이들이었지요.

 

밥을 하는 사이사이 짬짬이 바느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재봉틀이 고장났더랬네요.

그리 어려운 구조가 아니라 기계를 뜯었습니다.

요리조리 옴작거려보고, 다시 끼우고 돌려보고,

그러기를 두어 차례 했습니다.

“아, 됐다!”

됩디다.

학교의 가마솥방과 달골의 오신님방 방문 장식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의 감탄이 있었고,

바느질이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이들과 하고 싶은 수업을

이런 자극을 통해 그들 속에서 욕구가 생기도록 하려지요.

바느질 수업을 해주었으면 하고 샘들이 부탁해왔는데,

자연스레 이리 되었습니다.

 

저녁, 쪽파를 뽑아왔습니다.

지난 가을 끝에 심은 것이 겨울을 견디고 푸르게 솟아올랐고

제법 실허게 자랐습니다.

그 힘찬 생명의 기운이 아이들 입을 채울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기꺼이 마음을 낸 아이들이 도왔습니다.

진하가 먼저 건너와 쪽파를 다듬고 감자껍질 벗기고,

선재와 강유도 와서 손을 보탰습니다.

오징어 다진 것을 넣어 해물파전 되었지요.

카레를 같이 만들며

불 가에서 하는 아이들 수다가 퍽 즐거웠습니다.

“우리, 여기 와서 집에서보다 더 잘 먹지 않냐?”

“우리 엄마는 밥 잘 안 해.”

“아빠한테 시키기만 해.”

이제 이런 이야기도 흉이 아닌 사이가 되고 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아이들이 예쁘기 더, 더합니다.

김치부침개도 냈지요.

 

저녁이 내리는 마당.

바람이 본관 뒤란 잣나무와 아직 잎을 입지 않은 은사시를 건들자

나무들이 몸을 떨었고,

은사시 안 쪽 까치집은 의연하였습니다.

달포 전 어미 까치가 고래바람이 헤쳐 놓은 둥지를 보수하는 걸

한참 지켜보았더랬습니다,

삶은 경이다, 라는 문장을 읊조리게 하던.

바람 분다고 모든 나무가 다 흔들리는 게 아닙니다.

바람이 건드리는, 혹은 바람을 향해 손을 뻗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곧, 저녁달이 떴더랍니다.

 

한데모임.

오늘도 물꼬가 전하는 이야기 있었습니다.

1. 물꼬가 하는 일

내가 하는 일에 아무런 댓가를 받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맘을 풀고 치유받고 위로받고 위안받으며 간다.

그들이 복되다.

그런 이들이 돌아가 사는 곳에서 그 마음을 나눌 것이다.

그 맘을 역시 여러분도 익히고 나누길 바란다.

2. 이곳에서의 공부

공부도 공부지만 일을 통한 배움도 크다.

해본 놈이 잘하고, 일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머리를 알면 다른 일들도 그리 할 수 있다.

3. 정리하기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사람의 무성의가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작은 일 하나도 정성껏 하는 법을 익히자.

불 꺼라, 문 닫아라, 책방 정리해라, 피아노 깔개 덮어라...

정리한다는 건 책임진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하루정리글을 씁니다.

‘...애들은 어른과 아이가 평등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아닌 말이다.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그만큼의 권리가 있는 것이다. 애들은 맨날 논다. 그에 비해 어른들은 모두 일하고, 스스로 산다. 그런 식이면 아무 일도 안하고, 세금도 안내는 백수가 사회복지를 받는 것일 것이다....’(류옥하다)

이곳에 사는 류옥하다는 들어온 또래 아이들을 통해 생각이 많은 모양입니다.

슬쩍 고개 빼고 어깨너머로 날적이를 들여다보니 이리 쓰고 있었지요.

 

해수, 갈라진 발뒤꿈치에 습을 주고

로션마사지를 한 뒤 양말을 신겨 재웁니다.

“해수야, 밤마다 내 방으로 와라!”

여기서 나아갈 수 있도록 애쓰리라 합니다.

주말쯤 비염 약재도 달이려 하지요.

자전거를 타다 부딪힌 진하는

턱선 쪽에 소염제로 마사지를 해줍니다.

자고나면 괜찮을 테다 싶지만, 어떤가 낼 잘 살펴보리라 합니다.

 

샘들하루재기가 이어졌고,

한 주 지낸 이야기, 각 샘들의 역할, 그리고 다음 주 일정을 잡습니다.

뭔가 자리가 잡혀가는 느낌입니다.

준환샘과 희진샘이 겸손하게 이것저것 물어봐주었습니다.

그들의 교장선생이 아니나 그리 대하겠다 하고

일정에 대해서도 그리 의논하겠다 했습니다.

기꺼이 하다마다요.

제게 외려 기쁨이지요.

 

오신님방 앞에 오늘 낮에 만들었던 안내팻말을 걸었습니다,

오랫동안 방 이름으로 붙어있던 종이를 떼고.

다시 가만가만 읽어보았습니다; 有仁爲美

인심이 인후한 동네가 아름답다는 뜻으로,

<논어> 이인(里仁) 첫머리에 나오는 공자의 말입니다.

‘동굴에서 사는 사람은 동굴의 아궁이를 동쪽이라 생각합니다.

동굴의 우상을 벗어나는 것은 결국 동굴의 선택문제로 귀결됩니다.

사는 곳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쇠귀선생이 이리 풀어 주셨더랬습니다.

 

          내가 살아갈 곳 어디에다 잡을까 / 我處何所擇

          인심이 인후한 곳 거기가 좋고 말고 / 有仁斯爲美

          난초 있는 방에서는 향취에 젖어 들고 / 化馨在蘭室

          생선 가게 들어가면 악취가 배는 법 / 化臭在鮑肆

          사는 곳이 얼마나 중요하다 하겠는가 / 則知居乃重

          그래서 군자는 거처를 신중히 하느니라 / 愼之在君子

          유유하여라 목옹의 이 마음이여 / 悠悠牧翁心

          세상에 드러내 보여 줄 것은 없다마는 / 無以表於世

          바람 불고 읊조리며 벗으로 지내는 건 / 嘯咏與爲徒

          오직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있을 뿐 / 淸風明月耳

          듣고 보는 것이 거치적거리긴 하더라도 / 聲色雖相累

          담박하게 이욕(利欲)에선 멀어졌나니 / 淡然遠於利

          이는 바로 우리 동네 인후하기 때문이라 / 是爲里有仁

          이렇게 시를 지어 내 뜻을 부쳐 보노매라 / 相將寄吾意

 

 

날이 성큼성큼 갑니다.

벌써 아이들이 돌아가는 날에 대한 아쉬움으로

마음이 자꾸 바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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