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6일 쇠날 눈비, 덕유산 향적봉 1614m

조회 수 1449 추천 수 0 2004.12.02 20:16:00
11월 26일 쇠날 눈비

< 덕유산 향적봉 1614m >

2004학년도 가을학기 마지막, 산에 올랐습니다.
"백련사 가시려구요?"
"아니요, 정상까지 갈 건데..."
매표소 직원들이 걱정스러워합니다.
"가난한 학굔데..."
젊은 할아버지, 품앗이 진희샘, 그리고 저,
세 명 어른 값만을 받습니다.
"친절한 아저씨!"
이왕 베푸는 친절 목장갑도 세 켤레만 달라하였지요.
10시에 학교를 떠날 때는 굵던 비가
무주로 달려오는 길엔 어느새 우박으로 변하더니
이제 싸락눈이 되어 내립니다.
차 안에선서 모두 오늘의 자기 각오를 되냅니다.
겨울산은 특히 자기가 자기를 건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걸음을 맞추지 못하는 것도 다른 이에게 짐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처지지 않겠다는 혜연의 각오에서부터
평소에 제 자신의 과제이기도 한 것들을 입에 담았더랍니다.
삼공리, 산 들머리에서 다시 행장을 고치고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11시 30분.
"첫눈을 같이 보는구나."
초등 5년 사내 녀석들과 감악산에서 맞은 10여년 전의 첫눈은
아직도 너무나 생생한 아름다움이지요.
그리고 몇 해를 첫눈이면 대학로 마로니에에서 모이던
자원봉사 모임 나래 친구들 얼굴도 스쳐갑니다.
비장한 얼굴로 오가는 눈빛 교환이 모든 각오를 대신한 오늘 이 길도
우리에게 그리 남을까요?
백련사까지야 길이 좋으니 산오름이라기엔 멋쩍지요.
산을 잘 타는 놈들이니 여유를 부려도 괜찮겠다 하고
신대휴게소에서 무지무지 비싼 오뎅국 놓고 느린 요기도 합니다.
다시 오른 길, 누군가 저만치를 가리킵니다.
"저것 좀 봐!"
"우와!"
눈을 뒤집어쓴 은백색의 조릿대가 장관이었지요.
날이 더욱 칙칙해지고
바람발 눈발 거친 속에 백련사에 닿았습니다.
길이 열렸으면 향적봉에서 중봉을 거쳐
동엽령으로 해서 안성매표소로 빠졌을 걸,
지도 앞에 손가락으로만 짚어줍니다.
오늘은 향적봉 찍고 턴이지요.

백련사 화장실은 겨울날엔 안방입니다.

몸을 좀 녹이고 사탕을 배급받은 뒤
2.5 km 가파른 산을 오릅니다.
아직 남은 사탕 알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비상식량입니다.
같은 옷을 입고 극기 훈련을 하러온 어른들 무리가
띄엄띄엄 오래 이어져 내려옵니다.
"정상까지요? 진짜 추운데..."
"야, 아이젠도 없이..."
"대단들 하구나."
"일곱살도 있어?"
"이놈들 산악인들인 모양이네."
정말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려오던 어른들,
걱정스럽게들 인사를 건넵니다.
"정상까지 가면 네 시, 이야 못가겠는데..."
파이팅을 같이 외치며 저도 힘을 얻고 너도 얻으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극기 훈련하는 어른들 틈에
동네 언덕배기 오르듯 아이들이 기어 올라갑니다.
최대한 몰아붙여 정상 밟으면 네시,
덮쳐오는 어둠에 밀려 백련사까지만 무사히 온다,
거기부턴 물소리가 곁에 있고 길이 반듯하니
야간산행도 가능하겠네,
대충의 그림들을 그려봅니다.
바람은 여전히 거치나
눈발은 기세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쌓인 눈에 신발이 묻힙니다.
이런!
아픈 무릎이 성하다 싶으니 긴장을 놓친 게지요.
무릎 보호대도 놓고 왔단 걸 알고 나니 다리가 더 힘이 듭니다.
"어이!""어이!"
한번씩 서로를 확인하며 쉼 없이 올라갑니다.
저 아래를 보는 건 엄두도 못내고, 보일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격려하며 올랐지요.
시간은 낮 네 시를 향해 바삐 갑니다.
겨울산!
치악산 구룡사길이 얼마나 평탄하던가요,
그런데 그게 지옥이 되기도 하는 게 겨울산행이지요.
네 시에서 한치라도 벗어나면 위험하다,
위기감으로 발이 바쁩니다.
그때 최대의 고비가 등장합니다.
밧줄도 시원찮고 난간도 이미 눈이 들러붙어 언,
바윗덩어리 댓이 버티고 선 코스입니다.
포기해야할 지점인지도 모른다,
맘이 열 두 갈래지요.
이제부터는 각 개인의 의지에 맡깁니다.
자기 숨을 조절하며 갈만치 가는 거지요.
1km를 남겨두고는 다시 한 풀 접습니다.
"나라도 밟으께."
누구라도 모든 이를 대표해서 꼭대기에 발 찍어주면,
이왕이면 즐거움 더하겠지요.
나머지는 최선을 다해 오르는 데까지 오르자 합니다.
다리가 천근만근입니다.
이미 백련사부터 삐걱거렸던 다리입니다.
류옥하다가 따라붙습니다.
해보겠답니다.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가며 오릅니다.
10미터가 남았어도 네 시는 돌아 나와야 어둠을 피합니다.
"200m 남았다!"
1614m 향적봉 돌무데기에 류옥하다는 기어이 발자국을 남겼지요.
이제 어둠은 무서운 기세입니다.
얼른 돌아 나오니 령이가 200m 지점에 있습니다.
"지금 포기하지 않으면...."
정상을 눈앞에 두고 하는 포기라니...
그러나 고집을 꺾습니다.
20m(220m지점)를 내려오다 다시 셋을 더해,
다시 50m에서 다음 패를,
그리고 봉우리를 300m쯤 앞둔 곳에서 모두를 만납니다.
우리는 압니다, 다만 부족한 시간땜에 못오를 뿐이란 걸,
더한 오름도 거뜬했을 거란 걸.
가파르기가 급한 눈 내린 산길,
그것도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길이 만만할 리가 없지요.
우리 정근이가 가장 낭패입니다.
균형도 문제거니와,
층계가 구분이 잘 안되는 그의 눈이고 보니.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던 그가
산이 떠나가라 악소립니다.
안되는 걸음에 대한 답답함이고,
그래도 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겠지요.
앞선 걸음들은 뒷패가 못내 걱정입니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제 다리가 휘청이는 걸 본 예린이는 계속 제 안전을 염려하며
바로 앞에서 서두르지 않고 걸음을 맞추어줍니다.
"보인다!"
다시 백련사 화장실, 따뜻하기도 한 게서
다른 패가 내려오길 기다리며
공양간 가서 요깃거리도 얻어옵니다.
과일을 한 주머니 안겨주셨지요.
오데 가서 굶어죽진 않을 물꼬입니다.
모두가 화장실로 들어서자
누가 시작했달 것 없이 손뼉소리 높습니다.
다시 내려가는 길을 위한 파이 배급이 있었습니다.
화장실, 그게 뭐 대수이더이까.
얼마나 맛이 났던지요.
이제 야간산행입니다.
속도도 제법 냅니다.
아는 노래란 노래는 죄 부르고
물소리가 떠날 만치 판소리도 높았지요.

그때 저 앞에 차가 한 대 옵니다.
우리 앞에 멈추데요.
"어, 형!"
우리를 콘도까지 실어다 주기로 했던 선배입니다.
"조난으로 방송 탈 뻔했다야."
극기 훈련하던 어른들이 매표소 앞에서 그랬답니다.
선생님이 말하기를 산에서 잔다더라,
애들 입은 옷이며 부실하더라,
아이젠도 안했더라,
정상까지 가기 어려운 시간인데 꼭대기까지 간다더라,...
놀란 선배와 매표소 직원들이 산장에 전화를 하고,
그런데 산장에선 안왔다 하지,
산장지기가 내려가서 찾아본다 했는데 아무래도 뵈지 않는다 하고,
백련사도 연락이 안되고,...
선배가 사정을 해서 차를 끌고 들어온 겁니다.
산을 무수히 오른 그니까 그만큼 걱정도 컸겠습니다.
매표소에선 좀 더 기다려보고 조처를 취하겠다 했다지요.
우리는 흐린 하늘에서도 저 산봉우리 넘을락말락하는 옅은 달빛을 보며
한 밤의 산길을 즐겼는데 말입니다.
속이 탔던 선배는 되려 왜 왔냐는 아이들의 핀잔을 들어야했지요.
매표소에서 왜 오해가 생겼나를 그제야 알았더랍니다.
"우리 콘도에서 잘 거예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산골 촌놈들 그것도 자랑이라 널어놓았던 게지요.
그게 와전된 듯합니다.
그리고 그 어른들, 힘이 드니
고스란히 우리 새끼들의 위험으로 짐작이 된 거구요.

산 아래서 저녁을 대접받습니다.
"시간 바쳐 몸 바쳐 돈 바쳐..."
늘 물꼬를 지지하는 이들의 애정 어린 투덜거림을
선배도 잊지 않고 합니다.
선배가 콘도에 미리 가서 해놓은 밥은
아침이면 거덜나겠지요.
밥이 나올 때까지 갈무리를 합니다.
곁에서 어른들이 진지한 이네들의 모습에
재미나다 기특하다고들 합니다.
"하다가 모두를 대표해서 거 뭐랬죠, 봉우리?"
"향적봉."
"예, 향적봉을 밟아줘서 고마워요."
서로 애쓴 것에 대한 격려와 뿌듯함과
그런 진한 느낌들을 나눕니다.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무풍 일성콘도까지 눈길에 아이들까지 실었으니
오가는 길 한 시간은 잡아야지요.
여자들이 모다 식당에 남았습니다.
"다리도 풀 겸..."
상을 치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입니다.
"어쩜 저리 착하누..."
선생이 잘 가르쳐그렇답니다.
지들 잘하니 다 제 공이 됩디다려.
"어데서 왔노?"
"영양에서요..."
"얘들 다 도대표 시대표예요."
따져보니 그럴 듯했지요.
충북 영동, 경북 영양, 경기 부천, 서울, 강원,...

무사히 콘도에 들어오니 방 둘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아홉시를 훌쩍 넘었네요.
"텔레비젼 끄고!"
보면 안되냐고 말이라도 붙여볼만 하건만
켰다가는 두 말없이 끄는 아이들입니다.
목욕용품까지 챙겨온 물꼬지요.
빡빡 씻고 잠자리 조정(?)하고
그제야 어른들 얼굴 맞대니 열 한 시가 넘고 있습니다.
늘 고맙지요,
사람도 산도 하늘도.
장합니다, 우리 새끼들.
또 한동안 모든 것 다 '용서'입니다요.

그리고 11월 27일 흙날,
요가와 명상으로 아침을 맞고
밥 든든히 박박 먹은 뒤
아침 열시 약속한 밥알식구 정미혜님 김경훈님을 만났지요.
그 순간,
저어기 대학생들 든 상자에서
새우깡 거대봉지 하나 얻어먹는 것도 잊지 않았더랍니다.
날씨 한 번 화창도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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