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14.불날. 흐림

조회 수 985 추천 수 0 2009.04.25 03:10:00

2009. 4.14.불날. 흐림


하룻밤 사이 저 색 좀 보셔요.
마당 건너 백합나무에 잎 돋고
산벚 벙글고
둘러 친 산에 연두빛 차오르고
마을 앞 도화 붉습니다.

이른 아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대청소 합니다.
봄 뜰을 정리하지요.
마을 회관부터 치우고
수로를 중심으로 마른 풀들을 긁어냅니다.
논에 들어갈 물길을 살피는 일이기도 한 거지요.
그 물길 타고 온 물로 논마다 모를 키워낼 것입니다.

목수샘은 청소기며 전화기며 손이 가야할 것들을 살펴주고
다시 안동으로 집을 지으러 떠났고
미선샘도 서울에서 하는 연수에 갔지요.
이번 주말에는 고창을 다녀올 일도 있어
열흘쯤 있다 돌아올 예정이랍니다.

한 시인을 추모하는 행사를 준비하는 이가
해남에서 연락을 했더랍니다.
맨날 맨날 똑 같이 하는 거 말고
뭔가 다른 걸 준비해보고 싶다지요.
자리한 사람들이 함께 시화 걸개 이어달리기를 해보면 어떨까,
시를 가지고 하는 춤놀이는?
대동놀이처럼 법석스런 시놀이판이라면 재미나지 않을까 했지요.
겨울날 좁아 지냈던 삶의 자리들이
문 활짝 열며 넓어지는 봄날입니다.
곳곳에서 놀판이 벌어지네요.
아, 봄날입니다!

턱 아래서 아이가 눈 댕그랗게 뜨며 물어옵니다.
“엄마, 애들이 엄마를 왜 믿을 수 있는 거지?
어떻게 해서 아이들이 신뢰감을 가지는 거야?”
글쎄요,
부모님들이 곁에 없을 때
자기들을 돌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전적으로 기대는 게 아닐지요.
아이들은 동물 같은 감각으로
자기들을 섬기는 상대를 한눈에 알아보기 때문은 또 아닐지요.
어쨌든 아이 눈에 교사를 향한 다른 아이들의 신뢰가 보였다는 게
퍽 기분 좋은 일이었지요.

아이는 요새 뭔가를 시키면 그리 소리칩니다.
“어마마마의 사상을 받들어 실천!”
“무슨 사이비 종교도 아니고...”
아이 아비가 그걸 보고 한 말이지요.
아직 부모 영향이 큰 나이여 더 그렇겠습니다.
여하튼 아이가 부모 하는 일을 알고
그 일을 바라보는 눈이
이왕이면, 부모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아주 기쁠 일이겠습니다.
그러면 충분히 삶이 공유된다 싶겠지요.

지나간 영화를 다루는 원고 하나 쓸 일 생겼더랬습니다.
미루다 이제야 글 보냅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허진호 감독/2001)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무겁지 않게 써서 보냈습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맺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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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벚꽃 아래 찾아온 은수와 상우가 재회한다.
"하나도 안변했네."
은수가 말했다. 그럴까. 그럴지도 모르지, 아닐지도 모르고.
할머니 갖다드리라고 꼬마 화분을 내미는 은수.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이지, 할머니의 선물은 너무 늦었다(하얀 고무신을 남기고 연분홍 치마를 입고 할머니를 떠났다.). 그건 회복되기 힘든 그들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들이 걷는다. 상우는 바삐 앞서 걷고 버겁게 걷던 은수 뛰어와 팔짱을 낀다.
그런데 아직도 그녀를 보내지 못했던 상우, 그제야 그녀를 보낸다. 상우의 사랑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봄날이 갔기 때문이다.
보리밭에서 소리를 따는 상우의 미소로 영화는 문을 닫는다. 그는 어쩜 사랑에 대한 추억으로 저리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이 주는 치유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더라만... 사랑은 그런 거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이라던 노래 가사를 인용한다면 사실은 그 옛날이 남는 건 그 속에 사랑이 있기 때문 아닐는지.

상우도 사랑이 변하는 거라고 믿어서 그녀를 보냈던 것일까? 아니다. 사랑에 대한 자세가 다르다는 걸 명백히 알았기 때문이다. 가치관이 다른 거다.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래서 그녀를 보냈다. 그는 생을 아는 거다. 같은 문제가 또 꼭 같은 갈등을 일으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쉬 변하지 않는 줄 아니까. 여전히 그는 사랑 중이었으나 봄날이 갔으니까, 그래서 그녀를 보냈다. 그래서 영화 제목도 '봄날은 간다'이다. 한편 상우 안에서 사랑은 여전했기 때문에 봄날은 갔다가 아니고 간다라고 영화도 제목으로 삼았던 거다. 아니면 말고.

모든 사물은 변하지. 생성하고 변하고 소멸한다. 사랑 역시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나, 그러나 말이다, 사람살이의 유한성에서도 그래도 여전히 인간세를 끌고 가는 힘은 그 불변성에 있는 게 아닐까. 그리하야 인류는 오늘도 사랑의 불변성에 기대 살아간다 싶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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