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2.달날. 흐림

조회 수 1114 추천 수 0 2009.03.17 09:13:00

2009. 3. 2.달날. 흐림


논둑의 몇 그루 나무를 베었습니다.
떨기나무 수준입니다.
가끔 들의 나무는 그늘을 드리워
바깥일을 하는 이들에게 잠시 땀을 거두게 해주지요.
이것들 역시 언제는 쉬어가는 그늘을 만들 것이나
바로 마을 앞에 있는 둑이라 외려 일을 가로막아 왔더랍니다.
땔감으로 마당에 끌어다둡니다.
그것도 저들 쓰임이다 싶습니다.

작두콩 씨앗을 모종 놓았습니다.
종자로 삼는 놈이라면 거둔 것들 가운데
가장 튼실한 놈을 골라야 할 텐데,
지난해 작두콩은 꼬투리만 요란했지 알이 부실하였지요.
그래도 제(자기) 기억 속에 창창하던 가계에 대한 기억이 없지 않을 것이라며
마사 깔고 모래 깔고 상토 깔고 부엽토 넣어
모종을 내봅니다.

오전에는 냉장고 청소가 있었습니다.
식구가 몇 없어도
문 네 짝 자리 영업용 두 대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상주하는 이야 몇 없어도
여전히 오가는 이들이 많은 까닭이기도 하지요.
지난 겨울 계자를 맞으며 성훈샘이랑 소정샘이 뒤집어놓은 덕분에,
또 계자 끝나고 정리를 한바탕 해놓은 덕분에
일이 퍽 수월합니다.
저 안에까지 무엇이 있나 확인을 해두면
한 학기 내내 묵은 것들을 잘 꺼내먹게 될 테지요.
몇 해를 자리만 차지하던 쑥도 다 꺼내둡니다.
사람 북적이며 살 적
아녀자들이 들에 나가 캐고 데치고 말려둔 것들을
못다 먹고 해를 보내고 또 보냈더라지요.
새 쑥은 해마다 돋는데,
묵은 쑥은 자꾸만 밀리고 있었습니다.
옷감 물이라도 들여야지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도 치고
마른 풀들도 베어냅니다.
대장간에서 조선낫들을 좀 사들여야겠습니다.
철물점에서 산 낫은 가볍기는 하나
한 해가 지나고 나면 톱이 되어버립니다.
씨감자도 왔고,
호밀종자를 신청했습니다.
먹기보다 주로 풀을 잡는 데 쓰려지요.
포도나무 아래 한 번 심어보려 합니다.
닭똥도 들어왔네요.

대전에서 소책자 하나가 왔습니다.
졸업한 제자들에게 쓰기 시작했던 편지가
살이 붙어 거의 달마다 펴내는 소식지가 된지 20년을 넘었지요.
간간이 얻어 읽고 있었는데,
드디어 발행하고 계신 선생니이 겉봉투에 손수 쓰신 주소로
이 골짝에도 닿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길눈 밝혀주는 등불이 앞에 또 하나 켜졌습니다.

소식 궁금하던 선정샘의 글월이 닿았습니다.
‘안산의 병원에서
서울 종합병원으로 응급차를 타고
다시 양평 장례식장으로 응급차를 타고
또 다시 화장터로 운구차를 타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며칠을 보냈’다지요.
밑으로 남동생을 잃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했습니다.

비관스럽다기 보다는
허무하달까
역시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고 여겨야 하는 걸까
처신할 바를 모르겠는 마음이에요.

성빈이는 오늘도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고 있고
저도 끼니마다 밥을 추려 먹고 있어요.

정말 산 자만이 삶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인지
여기저기서 들었던 말들이 돌처럼 튀는 날입니다.

곁에서 그 선한 얼굴로 “두서없죠?” 하고 묻고
선정샘 스스로 답합니다.
“그러게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혹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도
우리는 여전히 끼니마다 밥을 추려 먹지요.
후욱, 사는 일이 무겁고 한편 별 일도 아니다 싶고
그래서 곡기를 넣는 일이 서글프다가
지나는 바람처럼 늘 내리는 햇살처럼 또 무심한 무엇이었다가...
처신할 바를 모르겠는 마음을 담은 글이 이 산골에 와서는
고마움이고 위로이고 그리고 처신이 되어주네요.
아무쪼록 건승하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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