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봄길 이틀째, 2월 26일

조회 수 1707 추천 수 0 2004.02.28 08:00:00
<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

4337년 2월 26일 나무날 흐리더니 덮치듯이 흩날린 눈발

가는 학년 보내기를 했지요.
안보낸다고 안갈 것도 아니나
그냥 흐르는 대로 보내는 게 아니라
잘 갈무리해서 보내주자 하였지요.
마음에 남았던 일들을 되짚어봅니다.
가족들과 한 여행에서부터,
한 친구랑 깊이 나눈 우정,
잘 했던 것 못했던 것들을 봄 병아리 땅 파듯 헤집어 봅니다.
지나간 그 시간들을
춤으로 노래로 연극으로 만들어보았네요.
어찌 표현할 지 얘기가 이어지고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소소하게 봄바람처럼 오는 기쁨을
글에다 다 담을 재간이 제게는 없습니다.
네 패로 나뉘어
찰찰대며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그칠 줄 모르던 웃음들,
몸으로 그네를 만든 지인이,
역시 몸으로 소나기가 되던 대우,
춤을 추겠다던 의외의 태린이,
아이들은 옷을 뭉쳐 운동회의 박 터뜨리기를 보이기도 하고…
잘하데요.
그 짧은 시간에 아이들이 내놓은 상상물들은
우리를 아주 눈물날 만치 웃게 하고
탄복하게 하데요.
같이 한 이들은 함께함의 즐거움을 나누느라
넘들 걸 보면서는 그 빛나는 재치에 감탄하느라
즐거운 한 때였답니다.
그 소박함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정말 사람이 무엇으로 사나 싶어요.
사람 사는 거요,
그게 무에 그리 별스럽겠는지요.
정토가 멀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 곁에 있어 마주 웃을 수 있고
같이 땀 흘리고 맛나게 먹을 수 있고
가끔 자연이 들려주는 음악들을 들을 수 있다면
천국인들 어찌 멀까요.

봄을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서성거리며 선뜻 들어서지 못하는 수줍은 이를
버선발로 나가 맞자 하였지요.
어, 그런데 눈이 펑펑 쏟아집디다,
정말 떡가루 같은 눈이,
날도 안찬데…
그래서 젊은 할아버지는 봄눈이라 부르시더이다.
그래도 나서자는 아이들 앞세우고 갑니다.
내를 따라 봄이 어디만큼 왔나 살펴봅니다.
우리 연규의 말마따나
“봄이 저 세상 끝에 있다는 걸” 절감했다지요.
눈발은 점점 거칠게 몰아치고
아이들은 시냇물에 더러 빠지고
먼저 가는 놈 먼저 가고
뒤에 오는 놈 뒤에 오고
없는 다리를 만들어가며 내를 따라 탐험은 계속 되었더랍니다.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그러다 ‘하다’는 그만 빠져 다시 옷을 갈아입고 여행을 계속하고
더 가다 경은이도 그만 빠졌댔는데
지선이 마른 신발을 경은에게 벗어주고
저는 젖은 발로 나아갑니다.
언니 값은 날 매운 날 젖은 신발로 드러납니다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로 시작하던 김남주님의 시는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로 끝나던가요.
서로서로 곁에 있어서 고마웠답니다.

죽이 잘도 맞는 박지와 태한
(지윤이가 둘이라 하나는 박지 다른 하나는 최지라 부릅니다),
없는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며 외투도 없이 놀고 있습니다.
눈발은 굵어지는데.
방에서는 두어 패로 나뉘어
종이도 접고 손놀이도 하고 작은 대동놀이도 하고,
다른 모둠방 하나는 아주 놀이터가 되었지요.
원영이 박지 대우 헌 현규들이 종이뭉치로 놀이를 만들고
저녁 먹고는 설거지를 하러, 책방으로, 곳곳으로 끼리끼리들 몰려갑니다.
유진이랑 책방 난롯가에서 책 읽다 지난 겨울 얘기도 나누었지요.
이곳의 책방, 숨쉬기 참 좋은 방이랍니다.
대동놀이를 끝내고도 어슬렁거리며 느림을 누리고
잊지않은 아이들은 양말을 빨아 널었지요.
대동놀이에서는 오늘도 오지게 뛰었습니다.

한데모임,
연규와 ‘하다’가 진행을 맡았지요.
“손 안든 사람 말 안했으면 좋겠어요.”
가끔 하다의 따끔한 소리를 들어가며 얘기가 바쁩니다.
남자와 여자가 적이냐,
예의 없는 자세가 습관이라 봐줘야 되는 거면
욕설도 습관인데 그건 왜 못봐 주냐,
결국 같은 거다…
같이 사는데는 필요한 얘기가 많기도 합니다.
생각들은 어쩜 그리도 다른지,
그런데 그 다른 생각들이 결국 어떻게 하나를 이뤄가는지를 느껍게 체험합니다.
문정이가, 노는데 ‘하다’가 방해했다고 툴툴대자
‘하다’는 보기만 했다는 상범샘의 증언이 있었고
귀찮게 할 의도는 없었다는 하다의 변명,
이어 문정이, 그것만이 아니라 하다는 어린데도 반말한다 화를 내고
원영이가 그의 말을 받습니다.
“네가 대우나 헌이형한테 반말하는 건 괜찮고 하다는 그러면 안되냐?”
어린 아이가 그러는데 왜 좀 너그럽게 봐주지 못하냐며
태정이 말을 이어갑니다.
“왜 경은이가 반말하면 기분 안나빠하면서
하다한테만 그럽니까, 그건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남이 귀찮아하는 걸 왜 하냐고 따지자
미안하다 사과해놓고
사과를 못받는 문정이더러 말이 안통한다고 툴툴거리는 ‘하다’.
등을 돌리고 구석으로 쑤욱 들어가버리는 문정이한테,
“서로 얘기를 하고 앉아서 해결하려 해야지.”
그렇게 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태정이 조율을 합니다.
한데모임은 참 좋은 자리입니다.
선뜻 수그러들지 않는 마음도
같이 꺼내놓고 다루다 보면 설득이 되거든요.
잘못한 행동을 손들고 고백하기 쉽지 않은데
용서가 있는 자리여서
누구든 제 잘못을 내어놓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또 서로를 다듬어갑니다.
이렇게 살면 정말 좀 사람 되어가지 싶어요.

잘자라고 이불 한 번 씩 여며주고 나오는데
아이들과 하루를 이렇게 정리하노라면
그만 목이 멥니다.
어데서 이 이뿐 것들이 왔을까,
이 불편한 곳이 다 무어라고 이리들 와서 누웠을까,
고맙고,
잘살아야겠다 싶습니다.

어제 같이 못내려왔던 태정이가
어머니 차를 타고 아침 절에 들어왔습니다.
태정이 어머니 잠시 부엌에서 차도 드시고 가래떡도 썰어주셨네요.
어떻게 무상교육을 하려 하냐 물었답니다.
물꼬가 올 해부터 상설학교를 열면서 학비를 받지 않는 거 들으셨지요?
그 때 마침 제가 부엌을 들어서며 대치동에서 온 전화 얘기를 했지요.
“대치동 한 모임에서 달마다 10만원씩 논두렁비를 낸대네,
게다가 학교 문여는 날 하는 작은 공연에 보태라고 70만원 보내셨단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돌아 나오고 난 뒤 태정 어머니 그러셨다데요.
맨날 하는 걱정이 뭘 입을까 뭘 먹을까 하는 건데
여기는 딴 세상 같다고.
하루재기에서 희정샘이 들려준 말에
일본에서 연수 온 유선샘도 거듭니다.
여기 오려고 여러 번 연락을 했는데
잘 닿지가 않더라고,
전화는 밤이고 낮이고 응답기가 돌아가고
요즘같이 최첨단 장비의 시대를 살면서 이메일은 답장이 없고
도대체 뭐하며 사는 곳인가,
마치 세속에서 떨어져 나온 패잔병들이 모인 스산한 곳 같기도 했다고.
자신이 살았던 세상은 메일을 보내고 바로 바로 오는 세상이었으니,
그런 속도감에서 이 곳의 더딘 반응에 아주 복장이 터졌다는 거지요.
그런데 정작 여기 와서 보니
손발이 안따라주는 바쁨 때문은 둘째치고
자신 또한 첫날을 빼고는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도 전화를 하는 것도 더뎌지더라고.
영동 이 골짝의 고요한, 거기서 생동하는 생동감이 얼마나 크게 다가오던지,
어찌나 큰 위안이던지를 나누어줍니다.
무지샘의 하루재기도 이어지네요.
“아이들과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내 몸에 박혀있는
능률위주의, 좋게 말하면 합리적인, 제 자신에게 절망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걸 못하는.
보글보글만 하더라도,
뭘 맡으면 애들하고 같이 해야 하는데
맡기되 덜 어수선하면서 어떻게 쌈박하게 끝낼까를 먼저 생각해요.
참고로 그래서 제가 들어가면 음식이 젤 먼저 나옵니다.
그게 제가 계절학교에서 젤 힘든 것 같애요,
느긋하고 어수선하고 그런 걸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고.
도시 생활은 그런 걸(합리라는 이름 아래의 능률) 조장하는 게 많은데,
다시 가서 살 생각하면 참…”

아이들을 통해서 우리네 삶을 바닥까지 봅니다.
아이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우리를 똑바로 쳐다봅니다.
우리의 비뚤어진 모습 이지러진 모습이 죄다 거기 있습니다.
그렇게 저 밑바닥까지 알고 나면
비로소 오르게 되지요, 어찌 살아가야 하나 길이 보입니다.
그래서 살고 싶어지지요.
냄새 나고 후줄그레한 제 모습을 보고 널부러지는 게 아니라
일어서도록 하는 힘이 바로 아이들이 주는 힘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하늘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하늘처럼 섬겨야 하는 거 아닌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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